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나의 야학(夜學) 전후사(前後史)(2/2)/그들은 예년처럼 어디선가 리어카를 몇 대 빌려서 우리를 태우고 졸업 축하 퍼레이드를 베풀어 주었다

청솔고개 2020. 6. 22. 00:42

나의 야학(夜學) 전후사(前後史)(2/2)

 

                                                                                                                      청솔고개

   대학 2년의 가을이 되었다. 정국은 이른 바, 10월 유신 선포로 얼어붙었다. 그날 아침 학교는 급기야 탱크로 둘러싸여졌다.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빠듯한 ‘향토 장학금(하숙비)’을 쓰면서 계속 야학 봉사활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귀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고향의 부모님 부담을 줄여 드릴 것인가 아니면 야학의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기로에 섰다. 결단을 내렸다. 남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 방법을 모색하였다. 야학 기숙사에 마침 한 사람이 들어갈 여유가 생겼다고 하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밥값은 들지만 다른 방값이나 생활비용은 절약되는 셈이다.

   나와 학교에서 입지가 비슷하여 말없이 잘 통하던 한 친구의 도움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리어카를 하나 빌려서 이불보따리, 책꽂이, 책상, 책, 옷가지 등을 싣고 시내의 대로 한복판을 가로질러 끌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달렸다. 그 광경은 내 생애에서 가장 극적이고 장엄(?)했다고나 할까.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기존 입주해 있었던 봉사 회원들과 한식구가 되면서 급속히 가까워지고 밀착되었다. 자연스럽게 야학 자원봉사서클에 활동하는 봉사정신에 충실하고 신념에 찬 여러 좋은 선후배 동기 회원들과 밀착 교유할 수 있었다. 실질적인 학교 책임자로서, 현직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교장선생님의 야학 실천 이념도 충실히 받아드릴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다. 내 정신의 위태함도 점차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없던 숫기도 좀 생기고 대화도 많이 늘었다. 물론 나의 투병 활동도 은근하고 끈질기게 계속했다.

   그 기숙사의 생활은 독특했다. 방이 5개인데 1실에 2명씩 모두 10명이 묵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보면 기숙사라 부르는 게 맞지만 야학교사의 입장으로 보면 야학에 부속된 일종의 관사나 사택이라 불러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것만큼 또한 제약도 있었다.

   이듬해 3학년, 그 다음 해 4학년까지 계속 기숙사에 기거했다. 처음엔 다소 힘든 선택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에게 미친 영향과 결과로 보아서 현명한 처사였었다.

   4학년 되어서는 그 야학의 담임 직을 맡게 되었다. 야학 운영의 실질적이고 핵심적인 멤버가 된 것이다. 1학년 담임 역할이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교사가 전문성으로써 담임 직을 수행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행착오가 적지 않아 보였다. 아직 본인도 배우는 과정에 있는 설익은 대학 4년생,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출내기 담임교사로서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에게 뭘 제대로 가르쳤을지는 모르지만, 순수함과 열정 하나로 최선을 다했다. 이것만은 참이었다.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어, 뚝심 하나로 매사를 잘 헤쳐 나갔었던 나였지만, 대학 졸업반으로서 학업 수행과 야학 담임교사 일의 병행은 쉽지는 않았다. 가장 힘 들었을 때는 그해 6월 들어서 실시된 6주의 교생실습 기간이었다. 사범대 부속초등학교 2주, 부속고등학교 4주, 모두 6주의 교생실습 기간은, 2년 입대 후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훈련 6주보다 솔직히 말해서 더 극한이었던 것이다. 낮에는 교생으로 혹독한 교생실습을 엄수해야 했으며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는 야학에서 내가 맡은 아이들 지도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었던 것이다. 밤 10시 이후는 또 내일 발표할 수업에 대한 자료와 교재 연구, 학습지도안 작성 등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때로는 새벽 3시를 넘길 때도 있었다. 나의 교사로의 정신 무장과 평생의 바탕이 마련된 것은 바로 이 6주의 혹독한 훈련 기간을 통해서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드디어 대학 졸업일이 다가 왔다. 내가 담임했던 1학년 아이들을 비롯해서 3년간 가르쳤던 많은 나의 제자들이 우리의 대학 졸업식장을 찾아주었다. 그들은 예년처럼 어디선가 리어카를 몇 대 빌려서 우리를 태우고 졸업 축하 퍼레이드를 베풀어 주었다. 많은 제자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캠퍼스를 누비었던 그 감동적인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생애의 찬연한 한 컷 영상으로 나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졸업을 축하하러 고향에서 온 부모님, 할머님, 종조모님, 숙모님 등 가족과 몇몇 친한 친구들도 이런 분위기에 동화되어 함께 축하를 해 주었다. 주체 못할 많은 꽃다발과 화환에 둘러싸여 리어카에 함께 올라타고 활짝 웃는 야학 제자들과 찍은 흑백 사진은 지금도 소중히 그날의 영광과 추억을 증언해 주고 있다. 단언컨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연이은 졸업 행사로 내 몸은 극도로 피로해졌다. 급기야 심한 독감과 몸살을 앓고 말았다. 나의 1학년 아이들이 열성을 다해 베풀어준 송별 사은회에 참석하긴 했지만 쇠약해져 후들거리는 몸에다 거의 다 잠겨버린 목소리로 눈물로 이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권하는 이별주 한 잔도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참 아쉽고 섭섭했다.

   드디어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 많은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30분도 더 떨어진 기차역까지 와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훌쩍 커버린 제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면서 씩씩하고 착하고 슬기롭게 자라라 하면서 다독거려 주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이제 이 아이들과도 이별이다. 그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이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는 좀 굵어진 손가락들이다. 아이들이 멀어져 간다. 1년 전, 갓 입학해서 한 학기 동안 교복 없이 초등생 티를 못 벗어나 보였던 아이들이 이제 중 2학년으로 올라간다. 그 생각하니 대견하다. 보람도 느낀다. 그러면 된 거다. 이제 보니 그 제자들이 최초의 ‘내 생애의 아이들’이었다.

   3월 초 나는 현직 교사로 첫 출발을 했다. 새 출발에 대한 설렘과 기대보다 현실 직업 전선에서 교직의 냉엄함은 감당하기 벅찼다.

   초임 생활이 힘들 때면 야학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 더 났다. 때로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픔과 애틋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때마다 아이들이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리움을 달랬다.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엽서에 연필로 또박또박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작년 담임 할 때, 고아원, 보육원 등 시설에서 다니던 아이들 몇몇은 늘 경계하는 눈치와 낯빛이어서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 이제는 그 아이들이 마음을 열었는가 보다. 누구보다도 그 아이들이 더 정성을 다해 엽서를 보내왔다. 그 엽서를 보고 나는 또 눈물을 지었다. 그렇게 3월, 4월, 봄날이 흘러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 초임 봄이 나에게 한편으로는 너무 잔인했지만 또한 행복했었다고 여겨진다. 북쪽에 위치한 초임 발령학교에서 남동쪽에 있는 고향으로 오려면 야학이 있는 지역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자주 들렀다. 이제 현직으로 봉급을 타니 호주머니 사정도 좀 나아져서 볶음밥이나 자장면에 고량주, 동태찌개에 막걸리 잔 푼은 살 수도 있었다. 야학 봉사자 후배들은 그때마다 은근히 나의 방문을 기대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이는 내 생애에 신나했던 몇몇 순간 중의 하나였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허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 다음해 봄 징병검사 결과 현역 소집 통지서, 즉 입대 영장이 나왔다. 6월 하순에 입대해야 한다. 이제는 그게 부담이라기보다 나에게는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영광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로써 나의 야학 전후사는 막을 내렸다.[더 자세한  내용은 그때 야학 활동의 역사를 기록한 문집 ‘**** 50년사’에 내가 투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음.] 

                                                                                        2020.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