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증조부님에 대한 기억, 그 4대에 이어진 연대기(年代記) 3

청솔고개 2022. 12. 3. 01:00

                                                                                                                          청솔고개

   58년 전, 내 나이 13세 때의 오늘, 3년째 고향을 떠나와서 생활하던 우리 식구에게 증조할아버지의 부음(訃音)이 전해졌다. 아버지, 어머니, 나, 네 살 되는 남동생, 그 해 늦겨울에 태어난 한 살배기 여동생 등 우리 식구는 함께 아버지의 근무지의 사택에서 30 여리나 떨어진 시내 정류소까지 일단 나왔어야 했다. 나와 네 살 먹은 동생은 걸었고 돌도 아직 안 지난 한 살 먹은 동생은 어머니 등에 업히곤 하거나 아버지한테 안기어서 나왔었다. 가져 갈 짐은 아버지 자전거에 실었다. 그러다보니 오전에 서둘러 출발했었지만 시내 정류소까지 나와서 합승[合乘, 相乘(아이노리)]을 기다려 타고 큰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었다.

   큰집 상가(喪家)에는 이미 마을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문상객들이 북적거리었다. 온 동네 멍석을 다 빌려서 마당에 깔고 두꺼운 광목 포장을 쳐 놓았다. 증조할아버지는 향년 여든한 살로 팔순을 넘겨 천수를 다하신 셈이다. 이른바 고종명(考終命)의 호상(好喪) 분위기임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아직 입관은 안 되신 상황이었다. 빈소에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등 상주들이 대나무 짝지를 짚고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초성 좋게 곡을 하고 있었다. 망인(亡人)의 손자인 아버지와 손부(孫婦)인 어머니는 큰집에 도착하자 말자 사랑채 생전 증조할아버지 거처하시던 방에 차려진 빈소에 들었다. 이어서 ‘어이어이’ 하면서 ‘어곡[哭]’을 시작했다.

   엄마와 아버지의 이런 곡소리를 들으면서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나도 좀 무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었는데 네 살 배기 내 둘째 동생에게는 오죽했겠나 싶었다. 둘째 동생은 문상객들이 절하기 위해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퍼질고 앉아서 떼를 쓰다가 결국 악머구리 같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죽담의 문상객이 벗어 놓은 신발을 죄다 빈소 방향으로 마구 집어 던지는 돌발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아이가 누군가하고 묻더니 셋째 증손자라고 하니, 이렇게 떼쓰는 행동을 보고 “그 어린 증손, 곡 한 번 크게 잘한다.”하면서 오히려 신통하다는 식으로 한 마디씩 거드는 걸 보았다.

   나는 허옇고 기다란 수염을 침을 묻혀 손가락으로 마치 가는 새끼처럼 꼬시면서 늘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증조할아버지께서 결국 저 병풍 뒤에 누워계신다는 사실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죽음의 상태나 상황이 결국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할 뿐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의 별세는 내가 맞닥뜨리는 우리 가족 구성원의 최초의 죽음이었다. 이후 둘째 종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둘째 종조할머니, 종숙부님 세 분, 숙모님, 어머니, 셋째 종조할머니, 아버지 순으로 가셨다. 명절이나 제사, 혹은 혼인 때에 특히 먼저 가신 그분들이 으레 여기 옆에 계셔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안 보인다고 하는 데서 비로소 죽음의 현상에 따른 존재의 부재(不在)가 확연히 실감되곤 했었다.

   마당에는 벌써 널을 짜기 위해 운반해 놓은 굵은 소나무가 군데군데 먹물로 금이 쳐져 있고 대목공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보였다. 계절은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었는데 상가가 된 고향 큰집의 밤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 어수선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된다.                       2022.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