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144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3/ 내가 풋풋한 향을 풍기는 매화꽃송이와 입맞춤이라도 하려는가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3                                                         청솔고개   걸어서 천천히 오르니 중턱에 정자가 보인다. 출발한 지 30분쯤 걸렸다. 정자에는 사람들이 난간에 앉아서 모두 황홀경에 취해들 있다. 뒤로는 산자락에 매화 꽃동산이 펼쳐져 있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앞으로는 너르디너른 매화밭, 그 너머 섬진강, 더 멀리는 지리산까지 아스라이 보인다. 옥빛 섬진강이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이곳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뷰포인트다. 온 천지에 봄기운이 미만하다. 봄의 정령인지 어른거리는 아지랑이가 매전(梅田)을 휘감아 오르는 것 같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공(時空)을 여기서 만난 것 같다. 땀을 식히고 꽃..

여정(旅情) 2023.03.17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2/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섬진강 물빛을 보니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2                                                         청솔고개   여기 남해고속도로의 휴게소에 얽힌 추억이 떠오른다. 이 또한 곧 상실될 기억이 될 것이지만. 섬진강, 그 강물의 흐름과 처음 마주했던 휴게소 난간. 가슴 벅차올랐던 곳이다. 그 섬진강 휴게소에 못 미쳐 하동 IC로 빠져나왔다. 지난 날 오르내리면서 자주 들렀던 곳인데 못 가니 아쉽다. 아내가 거기서 몇 차례 미꾸라지, 다슬기 산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도착하니 딱 9시다. 4년 만에 열리는 축제인지라, 첫날부터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 차가 빼곡하다. 차 세울 공간이 안 보여 계속 나갔더니 도사제방이라고 안내된 곳에 도착한다. 거기에..

여정(旅情) 2023.03.16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1/ 새벽안개 사이로 새벽달이 해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비현실적 풍광이다

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1 청솔고개 지난 십여 년부터 노래 부르고 꿈꿔왔던, 봄날 매화가 한창 필 무렵에 맞춰 광양 매화마을로 떠난다.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소망목록)를 지운 셈이다. 지난 가을 내장산 단풍 나들이에 이어 내 인생과제를 수행한 것이다. 아직도 이러한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를 더욱 고무시킨다. 새벽 4시에 알람 맞춰놓고 일어났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최근 5년 내에는 없었던 것 같다. 눈을 부비면서 5시 17분에 출발하였다. 먼 길을 무릅쓰고 내 손으로 차를 운전해서 갈 정도의 집념이 내게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축제 첫날의 복잡한 도로 사정도 감수한다. 아내가 흔쾌히 동반해 주어서 이 여행길이 더욱 훤해지는 것 같다. 아내는 옆에서 연신 소녀처럼 재잘거리면서 커피..

여정(旅情) 2023.03.15

길 위의 시간들, 별빛처럼 빛나다 3, 미서부 여행길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들은 사막 길 따라 존재한다

청솔고개   우리는 여기 샌프란시스코의 명소인 골든게이트 파크를 이른 아침에 버스로 올라가 보았다. 1월의 샌프란시스코는 안개가 무척 심했다. 전망대에 올라보았지만 온통 안개의 운해로 인해서 꽃의 도시라고 별명이 붙은 화려한 시가를 조망할 수 없었다. 겨울에 웬 안개가 이렇게 심하냐고 물었더니 이곳은 태평양의 영향을 받은 해양성기후라서 겨울철이 우기라서 그렇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 조깅코스를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달리는 시민들을 여럿이 보았다. 너무나 낯설고 신기했었다. 이곳의 위도가 상당히 높은데 1월에 이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 여행을 통하여 현지의 기후와 풍토의 다름이 여행 요소의 기본이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서부 여행길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들은 사막 길 따라 존재한다. 사막하면 ..

여정(旅情) 2023.02.22

길 위의 시간들, 별빛처럼 빛나다 2, 여행길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여행길에서의 명화 한 편은 인생길의 깊이와 폭을 한층 더해 준다

청솔고개 나의 맨 처음 장거리 여행은 미국 서부였다. 1996년 1월, 겨울이었다. 첫 해외여행이라서 뭔가 폼 나게 꾸미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옷도 새로 사고 여행가방도 하나 새로 장만했다. 비행기로 김포 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가는 데는 당시에도 10시간이 넘게 걸리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첫 장거리 국제선 비행기로 이동이라서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인상 깊은 것은 긴 밤 시간 비행에서의 지루함을 달래주려고 상영한 영화였다. 기내에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았다. 다리를 찍으러 온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매디슨 카운티에 사는 여인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과 나흘간의 폭풍 같은 사랑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자칫 길고 지루한 여행길에서 이런 감성과 낭만이..

여정(旅情) 2023.02.21

길 위의 시간들, 별빛처럼 빛나다 1, 그 불꽃과 안개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묘약이었다

청솔고개   이 나이 돼서 돌이켜 보니, 지난 날 나의 여정에서 느꼈던 감동과 설렘의 한 순간 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걸 실감한다. 나는 여행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기대는 나만의 것으로 아주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여행의 경로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영접하는 순간 떠오르는 느낌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휙 지나가서 놓쳐버릴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길 위에서의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매 순간 내 모든 감각기관을 최대한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는 나의 별이 반짝 빛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영감과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그걸 놓쳐버리면 한없이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어 ..

여정(旅情) 2023.02.20

다시 유월 5, 내 생애의 어느 하루 1973. 6. 16. 토

청솔고개 1973. 6. 16. 토,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6시. 거의 한 두 시간 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밝아진 아침입니다. 좀 더 일찍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산사의 계곡을 산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더군요. 아침 식사 후 가야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가야산은 골골마다 초로(草露)요, 봉봉마다 부운(浮雲)입니다. 이름도 모를 뭇 새들이 인적에 놀란 듯 푸드득거리고 있습니다. 산길 오솔길마다 산딸기가 퍽 탐스럽게 달려있습니다. 나도 후드득 떨어지는 물 길, 돌아 흐르는 물, 바위틈으로 숨는 물길 따라 흘러가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은 숨은 가빴지만 정상을 향해 오르는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거의 다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보니 봉마다 뽀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갸름한 봉..

여정(旅情) 2022.06.18

다시 유월 2, 내 생애의 어느 하루 1973. 6. 15. 금, 2

청솔고개 여기서 낮에 만났던 종성스님을 또 만났습니다. 고답(高踏)한 맛이 덜한 게 어떤 면에서는 퍽 호감이 가는 스님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두운 계곡을 끼고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종성스님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두 번이나 환속했다가 다시 들어오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그 스님은 내일 지월스님의 49재(齋)를 올린다고 몹시 바쁘다고 했습니다. 산사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후줄근하게 더운 낮의 날씨와는 달리 춥고 선선한 느낌이 듭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새로 비치는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내가 여기 해인 계곡에서 이러한 송간지명월(松間之明月)을 마주하게 되는 것도 영겁에서 한 찰나, 어떤 인연이 아닐까요? 순간이 곧 영겁(永劫)임을 알게 되니, 그래서 나의 무한한 감루(感淚)의 이 밤입니다. 어..

여정(旅情) 2022.06.02

다시 유월 1, 내 생애의 어느 하루 1973. 6. 15. 금, 1

청솔고개 모처럼 기대에 부풀었던 해인사(海印寺) 행이 오전의 방공대피(防空待避) 훈련으로 열이 좀 식어진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학교버스로 가두(街頭)에 실려 나와서 잠시 동안 계몽요원이 되었습니다. 오전 그 한 시간은 온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습니다. 뭔가 곧 일어날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였습니다. 출발 준비를 해서 오후 1시 20분에 주차장에서 시외버스로 출발하였습니다. 일행은 모두 19명, 남학생 14명, 여학생 5명이었습니다. 나는 창가로 바싹 다가앉아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보리걷이가 다 끝나가고 모내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약간 흐린 날씨였습니다. 나지막한 산들이 안개 같이 부옇게 그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번뇌와 불안 같은 불편한 기분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보리까락을 태우는..

여정(旅情) 2022.06.01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11~12일/ 흐린 하늘색이 그대로 투영된 크뢰단 빙하호수는 노르웨이 물길을 거스른다, 야일로에서 오슬로까지 약 250km를 서너 시간 동안 달리면서 마지막 노르웨이..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11~12일 청솔고개 오늘은 현지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이다. 07:05 호텔에서 출발. 날씨는 약간 서늘하고 역시 짙게 흐려 있다. 어제 내가 정말 보았던가 싶게 우리 호텔이 그림 같은 목조 건물이 잔디와 초지 위에 서 있다가 멀어진다. 자작나무의 스스로 그 고귀한 자태를 여기서는 맘껏 볼 수 있어서 좋다. 내려올수록 움조차 트지 않았던 산장마을과는 달리 숲은 더욱 짙어진다. 계곡마다 눈 녹은 물이 콸콸 쏟아진다. 아직 양, 염소, 소, 말 같은 가축은 안 보인다. 흐린 하늘색이 그대로 투영된 크뢰단 빙하호수는 노르웨이 물길을 거스른다. 오슬로 공항 까지 가면서 이 호수를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고 또다시 만난다. 거울 같은 빙하 호숫가에도 노르웨이 숲은 이어져 있다. 자작나무숲의..

여정(旅情) 202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