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길 위의 시간들, 별빛처럼 빛나다 2, 여행길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여행길에서의 명화 한 편은 인생길의 깊이와 폭을 한층 더해 준다

청솔고개 2023. 2. 21. 22:31

                                                                   청솔고개

 

   나의 맨 처음 장거리 여행은 미국 서부였다. 1996년 1월, 겨울이었다. 첫 해외여행이라서 뭔가 폼 나게 꾸미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옷도 새로 사고 여행가방도 하나 새로 장만했다. 비행기로 김포 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가는 데는 당시에도 10시간이 넘게 걸리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첫 장거리 국제선 비행기로 이동이라서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인상 깊은 것은 긴 밤 시간 비행에서의 지루함을 달래주려고 상영한 영화였다. 기내에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았다. 다리를 찍으러 온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매디슨 카운티에 사는 여인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과 나흘간의 폭풍 같은 사랑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자칫 길고 지루한 여행길에서 이런 감성과 낭만이 충만한 한 편의 영화는 여행의 품격과 다양성을 가져다주었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어떤 여행길이라도 인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행길에서의 이런 명화 한 편은 인생길의 깊이와 폭을 한층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미 서부여행 하면 연상되는 게 밤새 기내에서 보았던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이다.

   우리는 15명 내외의 단체 여행단이어서 이동과 여정에서의 편의를 위해 복장의 일부를 같이했다. 각자 여행복장에다 다만 등산용 빨간 조끼와 니트로 된 귀가 덮이는 빨간 모자를 착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것이 단체여행단에서의 관행 같은 것이었다. 밤새 긴 시간을 비행기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몽롱한 기분으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지만 모두들 설레고 들뜬 표정이었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해서 다시 모이려는데 일행 중 두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늦어진 이유는 우리의 복장 때문이었다. 호주머니가 많은 등산용 조끼는 공항 보안요원에게 충분히 의심을 갖게 한 것이다. 아직도 미국은 마약으로 나라가 멍들어 가는데 우리가 입은 등산용 조끼의 많은 호주머니에는 수상한 물질을 숨길 수 있다는 혐의를 갖게 했고 급기야 마약탐지견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흐느적흐느적 꿈적거리는 송아지만한 탐지견을 보는 순간 정말 불쾌하고 불편했다. 물론 우리들의 신분과 여행의 목적을 충분히 설명한 뒤 아무 일없이 풀려났지만 여행 초반부터의 이런 태클은 여행 내내 씁쓸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검색행태가 만약 아직도 남아 있음직한 인종 차별 인식에서 나온 발상이었다면 단순히 불쾌에서 그치지 않고 분노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성의껏 차린 복장으로 여행단 개개인의 기대와 설렘이 나타났는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여행 초반부터 뭔가 한풀 꺾인 듯한 분위기가 돼버렸다.      2023.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