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蟾津江) 매화기(梅花記) 1
청솔고개
지난 십여 년부터 노래 부르고 꿈꿔왔던, 봄날 매화가 한창 필 무렵에 맞춰 광양 매화마을로 떠난다.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소망목록)를 지운 셈이다. 지난 가을 내장산 단풍 나들이에 이어 내 인생과제를 수행한 것이다. 아직도 이러한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를 더욱 고무시킨다.
새벽 4시에 알람 맞춰놓고 일어났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최근 5년 내에는 없었던 것 같다. 눈을 부비면서 5시 17분에 출발하였다. 먼 길을 무릅쓰고 내 손으로 차를 운전해서 갈 정도의 집념이 내게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축제 첫날의 복잡한 도로 사정도 감수한다. 아내가 흔쾌히 동반해 주어서 이 여행길이 더욱 훤해지는 것 같다. 아내는 옆에서 연신 소녀처럼 재잘거리면서 커피를 타 준다, 간식을 챙겨준다 하면서 들뜬 모습으로 신나한다. 이제 예순 중반을 넘어가는 아내가 여전히 나는 사랑스럽다. 아내가 이렇게 멀리 떠나는 걸 아주 귀찮아하면 나의 이 열정도 훨씬 식어갈 것만 같은데 아내의 여행 의지는 굳건하다.
날이 좀 길어졌다고 하지만 새벽 5시는 아직도 깜깜하다. 고속도로 연변 고향마을을 지나치는데도 잘 몰라보았다. 남양산 분기점 근처에서부터 짙은 안개가 낀다. 잠깐 오리(五里)나 무중(霧中) 상태다. 바짝 긴장이 된다. 낙동강 하류의 습한 기운 때문인 것 같다. 쌍 깜빡이를 켜고 저속으로 조심해서 갔다. 다른 차들도 모두 조심한다.
새벽안개 사이로 새벽달이 해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비현실적 풍광이다. 봄날의 여명, 새벽안개, 새벽달의 조합은 제법 시적이기까지 하다. 이윽고 안개지역을 벗어날 때 느끼는 안도감은 또 하나의 내 생존 실감이다. 생존 본능, 위험 방어가 어우러져 극적이기까지 하다. 지난 날 봄날 되면 매화를 어느 집 담장 너머서 한 그루씩 목례만 나누다가 오늘은 드디어 온 산에서 나를 환영하는 군중처럼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사군자(四君子) 중 남은, 난(蘭), 국(菊), 죽(竹)과의 만남도 이제는 매화처럼 새롭게 해야 하나. [2023.3.10.금. 맑음]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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