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29

순수(純粹)가 순수(純粹)에게 2

청솔고개 50년이 더 지난 이제는, 한 순수가 어떤 순수에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좀처럼 회복될 수 없음을 내 생애 닥친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순수라는 감정의 과잉 노출이 치기(稚氣)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지만, 나의 20대 초반 그 내면에 닮긴 정신만은 진실이었음을 감히 증언한다. [‘경아’는 당시 야학에서 내가 담임한 학급의 50여명 학생 대표로, 편지를 받는 가상으로 설정한 아이 이름임. 1975년 2월 말, 나의 사범대학 졸업, 발령과 더불어 야학을 떠남에 즈음하여 남긴 편지임. 1974년 겨울, 야학 문집에 실렸던 것으로 새로 실으면서 조금 다듬었음. 2023년 신년을 맞으면서. 2022.1.14.의 1편에 이어서 2편으로 이어짐.] 꿈속의 소녀 경아에게 2 나는 ..

순수(純粹)가 순수(純粹)에게 1

청솔고개 다음은 나의 이십대 중반, 야학 교사를 하면서 한 순수와 순수가 만나는 장면을 설정하여 보낸 서간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 어린 순수를 향한 나의 메시지가 너무 감성과잉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당시 내가 생각하는 순수의 전형을 나름 형상화한 것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과잉 정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순수가 실종되는 시대에는 이런 순수감성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심경이다. 어떤 곳은 나의 치기(稚氣)어린 가르침이 생경(生硬)하게 드러나 있고 어떤 곳은 내가 생각하는 순수의 원형을 그려낸다고 애쓴 흔적도 보인다. 48년 전에 내가 가장 추구하는 순수의 원형이 무엇인지 이 감정과잉(感情過剩), 치기 넘쳐 보이는 표현을 통해서 이를 다시 회상할 수 있음은 나의 행복이다. 꿈속의 소녀 경아에게..

나의 인연, "나의 아사코", 그후

청솔고개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할까? 이제, 내게 꼭 24시간이 부여됐다, 자 지금부터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간절히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은 지난날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 첫째는 내 유년의 평화경으로 돌아가고 둘째는 내 순수의 20대 말이 다시 돼 보는 것이다. 다음 서신은 이러한 나의 열망을 반추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 20대 후반, 군 시절에 걸친 불안, 혼란, 순수, 열정이 혼재된 시절, 나의 한 인연이 나를 향해 손짓, 고개 짓하던 한 모습의 한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인연, "나의 아사코",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마냥 소녀의 순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 순수에 다가갈 용기가 없던 것이었다. 42년도 더 전 일이다..

나의 야학 활동 회상 3/ 아이들은 작은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흘러내려서 차창 너머로 마주보면서 손을 흔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야학 활동 회상 3 청솔고개 드디어 꿈동산의 품을 내가 떠날 날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담임한 1학년 아이들은 환송연을 한다고 정든 1학년 교실에 음료수, 과자, 술을 준비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 푼이 아쉬운 그들인데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모인 아이들의 대부분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침통한 분위기를 흥겹게 바꿔 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내가 먼저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습니다. ‘스승의 노래’ 합창으로 시작해서 다채롭게 춤도 추고 나의 ‘이별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끝내고 교실 문에서 나는 떠나가는 아이들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을 잡아 주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꿋꿋이 지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내가 이제 정말 꿈동산을 떠나는 날인데 그날도 13명의 학생들이 출발역..

나의 야학 활동 회상 2/ 수많은 어린 제자들이 꼭 쥐어 주는 손수건 한 장 한 장, 꽃 한 송이 한 송이

나의 야학 활동 회상 2 청솔고개 꿈동산의 가을은 여름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수돗가 등나무 넝쿨, 운동장 가의 수양버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려운 꽃동산 식구들은 벌써 겨울채비에 마음 졸여야 했지만 가을은 그래도 추억의 계절이었습니다. 꿈동산의 겨울은 눈이 오면 더욱 신이 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고 교실이며 기숙사며 온통 눈싸움으로 눈투성이가 되지요.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순수해집니다. 입구 골목길에 군고구마와 군밤, 따끈한 찐빵이 더욱 인기 있는 철입니다. 이때쯤은 벌써 뜨뜻한 동태국물에 막걸리 한 잔 걸쳐 취한 몇몇 선생님들이 노변에서 대학가의 에피소드, 시국의 흐름, 꿈동산학교의 제반 문제점 등에 대한 소탈한 정담으로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꿈동산학교의 시장 골목은 더욱 ..

나의 야학 활동 회상 1/ 기대와 호기심에 반짝이는 2학년 50여 명의 눈동자가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야학 활동 회상 1 청솔고개 어언 15년이 흘렀군요, 어느 한 회원의 권유로 그려준 약도만 갖고 내가 마치 영혼의 갈 길을 잃은 한 나그네가 안식처를 찾아 나서듯이 꿈동산을 찾았던 그날이. 1972년 늦봄 어느 하루 해질녘, 그날의 저녁놀이 지금도 선연히 내 마음의 영상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서산에 깃들일 때 복되고 참된 종소리 울린다…….”로 시작되던 교가의 첫머리는 그 후 나의 영원한 이상향이었던 꿈동산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 한 음악 선생님이 단정히 차려입은 학생들에게 풍금을 연주하면서 혼신을 다해 지도하시던 모습이 바로 꿈동산의 표상이고 첫 얼굴이었습니다. 이윽고 교무실을 찾았을 때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나를 반기시던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 또한 기..

카페 [국어사랑모임] 20년 (1/2)/온라인에서의 이러한 활발한 소통은 오프라인에서의 역동적인 수업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카페 [국어사랑모임] 20년 (1/2) 청솔고개 오늘은 나의 교직 후반을 아주 역동적으로 만들어주었던 나의 학습커뮤니티 카페 [국어사랑모임] 개설된 지 꼭 19년 째 되는 날이다. 바로 2001년 9월 5일 당시 한창 ICT열풍에 부응하여 용기 내서 만든 것이다. 여기서 내가 퇴직한 2014년 8월 말까지 활동했으니 그 때까지의 활동상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 군데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만 13년 동안 나는 카페지기로 활동했었다. 내 생애 아이들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당시로서는 아주 트렌디한 소통의 장이었다. 그래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아이들은 내가 하는 수업이 제일 흥미 있다고 집에 가서 홍보를 하는 바람에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 학부모가 나를 일부러 찾아주었던 유쾌한 기억도 있..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7/ "‘내 생애의 마지막 아이들이여!’ 하고 불러야 할 것 같군요"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7 청솔고개 청솔고개의 마지막 희망편지 ‘내 생애의 아이들’, 그 마지막 아이들이여! 팔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계절은 벌써 가을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은 이 청솔고개의 마지막 희망편지라서 여러분들을 ‘내 생애의 마지막 아이들이여!’ 하고 불러야 할 것 같군요. 여러분하고 같이 하는 마지막 서신! 그래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1975년 3월 1일 자로 병아리교사, 청년교사 청솔고개는 경북 한 복판에 소재한 한 고등학교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39년 6개월을 한 길로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 한 주, 이렇게 여러분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게 인연이라고 하는가봅니다. 선인들께서 옷깃이 스치는 인연을 ‘겁(劫)’이라는 단위로 설명하더군요. 겁은 천지가 한 번 개..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6/이 시간이 내 생애의 수업의 마지막 시간이다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6 청솔고개 2014. 8. 29. 금. 갬.(후편) 2교시에는 오늘 퇴직을 앞둔 다른 퇴직 동기 둘과 같이 인사 차 교장실에 다녀왔다. 두 시간 내리 수업이 없어서 남은 일을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퇴직 동기 둘로부터 인터넷 사이트 프로그램에서 처리하는 명예퇴직금 신청 절차에 대해서 도와달래서 처리해 주었다. 내 마무리 일은 못하고 그냥 보내버렸지만 그래도 같이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마지막 날을 보내는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6교시, 2-3, 내 생애 마지막 날 마지막 남은 한 시간 수업이다. 아이들도 푹 가라앉은 표정이고 반분위기도 많이 고요하다. 원래 이 반 아이들은 매우 침착하..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5/이제 나는 아이들한테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교실을 떠난다

내 생애 ‘마지막 수업’ 그 5일의 기억 5 청솔고개 2014. 8. 29. 금. 갬.(전편) 오늘, 내 교직 생애 마지막 일주일의 끝날. 비감해 진다. 뭔가와 영영 헤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 실감한다. 0교시 2-3 교실에서는 6교시에도 수업이 또 있으니 그냥 지나갔다. 1교시 2-1, 수업을 30분 정도 하고 나머지 시간에 마지막 ‘청솔고개의 희망편지’를 읽어 주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수업일. 생각하니 나 스스로 또한 만감이 교차한다. 아이들도 모두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이다. 아이들이 스승의 노래를 부른다. 다른 반 수업도 있고 하니, 내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좀 조용히 불러달라고 손짓으로 주문한다.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따라 준다. 고맙다. 케이크도 준비했다. 아이들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