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90

다시 빈집에서 5/ 아버지의 아흔 셋 한 생애의 자취와 기록이 당신의 부재로 인해 한꺼번에 세월의 뒤안길에 파묻히거나 태워져 흙이나 재로 영멸(永滅)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시 빈집에서 5, “더 이상 역류(逆流)하지 못하는 세월이라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 청솔고개 나는 암만 생각해도 아버지의 아흔 셋 한 생애의 자취와 기록이 당신의 부재로 인해 한꺼번에 세월의 뒤안길에 파묻히거나 태워져 흙이나 재로 영멸(永滅)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최근현대사는 이렇듯 이름 없이 왔다가 이름 없이 떠난 수많은 민초들이 이룩한 피와 한의 퇴적물이다. 그들의 육신이 지수화풍으로 회귀했다고 그 정신 자료마저 영멸의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너무나 허탈하다. 이제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다. 비가 온다. 더욱 세차게 온다. 화단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아진 장독 뚜껑 위에 빗물이 고였다가 옆으로 퍼져서 바로 떨어지는 모습을 얼마..

아... 아버지! 2023.07.29

다시 빈집에서 3/ 이 빈집에서 나는 나의 부재, 상실, 죽음 등을 체감할 수 있다

다시 빈집에서 3, “내가 갑자기 무슨 애니미즘(animism) 혹은 정령신앙(精靈信仰)에나 경도된 것처럼 느껴진다.” 청솔고개 나는 왜 이 여름 두 달 째 아침마다 복잡한 골목길을 거쳐 이 낡은 집을 찾게 되는가. 그것은 이 집에서 실감하게 되는 부재, 상실, 죽음 때문인 것 같다. 이 빈집에서 나는 나의 부재, 상실, 죽음 등을 체감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나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다. 나의 생존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런 것들을 통해 내가 비로소 위안을 받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희한한 일이다. 아마 언젠가는 나도 그러한 상황의 중심에 서게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인가. 여기 빈집 방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물상(物像)들에서 내가 이생에서 알고 겪었었던 누군가의 부재, 상실, 죽음을 ..

아... 아버지! 2023.07.27

다시 빈집에서 2

청솔고개 큰집을 찾았다. 치우다가 보니 자그마한 나무궤짝이 나뒹굴어져 있어서 뭔가 들쳐봤더니 어머니가 생전에 쓰시던 재봉틀[미싱]이다. 이를 보는 순간 세월이 갑자기 4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어머니가 다소곳이 앉으셔서 우리 오남매의 내복을 박음질을 하시던 그 모습이 바로 옆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다시 가슴이 미어져오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며 콧잔등이 찡해온다. 아, 어머니, 그 옆에서 다시 불러도 대답조차 없으신 내 어머니! “이제 당신 계신 곳을 나도 불원간 찾아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하고 속으로 되뇌어 본다. 엊그제 옥상에 올라가서 차곳독을 들춰보았더니 대소쿠리, 바디, 작은 산대기, 망태기 등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만지면 풀풀 날리는 세월의 먼지가 오히려..

아... 아버지! 2023.06.28

다시 빈집에서 1

청솔고개 큰집에 갔다. 이제 동생도 이사해서 정말 빈집이다. 침묵과 먼지의 냄새가 조용히 풍겨온다. 이제 이 집 주인은 벌써 수년째 찾아오는 어미 제비 한 쌍이다. 벌써 새끼들이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 달라고 떼쓴다. 다섯 마리다. 그 지지배배 소리만 빈집을 울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의 생애가 어리고 우리 오 남매가 자란 곳이다. 그래서 그때 끊임없이 복작거리던 시절이 떠오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사시다가 여기서 가셨다. 어머니,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치셨다. 입원하고 계시면서 참 많이 오고 싶어 하셨던 큰집이다. 그리 그리워하시던 집에 한 번 와 보시지도 못한 채. 이제 마지막을 지키고 있던 첫째 동생마저 둥지를 마련해서 떠나갔으니 그야말로 빈집이다. 동생들과 같이 부대..

아... 아버지! 2023.06.27

버림과 지님, 기록과 기억 2

청솔고개 지난 연말에 큰집에 들렀다가 아버지의 기록물 하나를 들고 왔다. 아주 두꺼운 대학노트에 아버지가 작정하고 시작한 당신의 회고록 초안(草案)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 생애에서 비교적 극적인 부분을 축약하고 회상해서 쓰다가 다 완성하지는 못한 채 멎어 있었다. 60년대 말, 50여 년 전 현직에 있을 때, 교원의 정기 인사 때 당신의 뜻과는 달리 집에서 아주 먼 북부지방으로 인사 조치된 데 대한 불편한 심중이 소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기록 중 가장 빠른 날짜가 2019. 11. 6.로 돼 있다. 맨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1930年 11月 17日(檀紀四阡二百六拾參年十日月十七日生) 姓名:○○○ 行列(橿烈), 字(基錫) 父(○○○) 母 父母任으로부터 이 世上에 태어났습니다…..

아... 아버지! 2023.01.04

아버지 가시는 길 9

청솔고개 2022.8.25.목. 갬, 2 방호복 같은 걸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종중회장님이 능숙하게 돌 덮개를 열고 어머니 모신 옆에 아버지 유골함을 안장한다. 이 개토(開土)제 엄수 후 하관(下棺)이 되는 셈이다. 이전에 내가 아버지 유골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었는데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다. 유골함 위에다가 내가 맨 먼저 황토 흙을 채워 넣었다. 맏상주 예우다. 이어서 동생들 순으로 엄수했다. 가시는 마지막 노잣돈은 큰매제가 대표로 쾌척한다. 그 노잣돈을 지니고 드디어 아버지는 묻히셨다. 검은 넓적한 돌로 된 덮개도 덮이고 테이프로 가리었던 아버지 음각 기록도 벗겨서 드러났다. 이 과정은 고유제, 평토제, 삼우제 모두를 축약한다고 호상(護喪)격인 장의차 운전사가 몇 차례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래..

아... 아버지! 2022.12.16

아버지 가시는 길 8/ 내 차로 아버지의 유골을 내가 모시고 묘소로 올랐다. 그래도 마지막 이 길 만큼은 내가 모시고 가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청솔고개 2022.8.25.목. 갬, 1/ 내 차로 아버지의 유골을 내가 모시고 묘소로 올랐다. 그래도 마지막 이 길 만큼은 내가 모시고 가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새벽에 깨서 장례식장에 갔다. 오늘 아버지 가시는데 비가 그쳐서 정말 다행이다. 맏상주가 잠시라도 이리 자리를 비워도 되는가 싶다. 08:00에 발인제(發靷祭)를 모셨다. 이어서 08:20에 발인했다. 이 길은 다시는 못 오실 길, 영결종천(永訣終天)의 길이다. 아버지의 육신을 앞에 두고 치르는 마지막 의식이다. 나는 큰매제 차로 갔다. 09:30에 화장장에 도착했다. 익히 보던 길이다. 예정보다 상당히 이르다. 5호실에서 하관(下棺)제를 치렀다. 장례지도사이며 장의버스기사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 유해의 화장 시작 직후 묘소까지 아버지 유골함 옮..

아... 아버지! 2022.12.15

아버지 가시는 길 7

2022.8.24.수. 비 청솔고개 오늘 늦어도 아침 7시 전까지는 장례식장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렀다. 아직 친인척도 문상객도 아무도 없다. 오전 내내 부고 보낼 곳을 선정하고 문구 다듬어서 전달하는데 시간을 다 보낸 셈이다. 아버지의 별세라는 큰일과는 달리 또 다른 일이 이렇게 비즈니스처럼 진행된다. 요양병원 가서 사망진단서 끊고 근처 은행가서 정기예금 해약하여 장례비에 대비했다. 비가 많이 내린다. 우산도 없이 뒤뚱거리면서 가는 내 모습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다. 망자는 말이 없고 남은 사람은 이리 현실적이 된다. 나갔다 오니 일착으로 ㅊ, ㅎ 등 절친 둘이 조문 와 있다. 고맙다. 오후가 되어도 민망할 정도로 조문객이 드문드문 보인다. 예상할 수 없어서 조화 몇 군데 요청해 놓았었는데 큰..

아... 아버지! 2022.12.14

아버지 가시는 길 6

청솔고개 2022.8.23.화. 흐림, 5 저녁 10시 55분에 요양병원에 전화로 아버지 별세 사실을 확인했다. 막상 사실을 듣고 나니 마음이 일단 더 차분해지는 것 같다. 둘째에게도 소식 전하고 나서 태워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가니 벌써 아버지의 시신은 안치실에 보관돼 있었다. 아버지의 사망시간을 물으니 2022. 8. 23. 22:15라고 정확히 말해주었다. 벌써 장례식장 안치실에 이송 완료된 상황이었다. 안치실에 들어가니 입을 크게 벌리고 계시는 아버지 모습이시다. 아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면서 덮고 있는 얼굴을 벗기고 확인하면서 또 나직이 오열한다. 아이도 오열한다. 나도 “아버지,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안히 가십시오.”하고 나직이 말씀 드렸다. 사무실에 들러서 장례에 대한 여..

아... 아버지! 20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