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나의 편지 90

빗속의 염송(念誦)

청솔고개 떠난다 산 아래 대숲을 빗속을 헤치고 지난다 운무(雲霧) 자욱한 옥룡암자를 쫓아온다 나를 청솔고개 너머 보이는 쉼터까지 빗속의 암자의 옴마니반메훔이 참 좋다 나는 빗속 산길을 걷는 게 세상 제일 좋은 거 이렇게 걷는 거 끝없는 길을 이생에서는 외롭지 않다 결코 빗속 길은 혼자 걸어도 말 걸어온다 비가 내게 또닥또닥 토닥토닥 추적추적 하고 어루만진다 내 얼굴을 보슬보슬 포슬포슬 비가 최선의 위무(慰撫) 상큼하고 말끔한 들린다 빗속에서는 바로 옆에서 암자의 머언 염송(念誦) 두드린다 문 없는 문 내 마음의 문을 깊고도 세게 취한다 법문(法問)에 법당 청솔고개에서 나는 길 없는 길을 걸으며 가없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빗소리 안 하염없이 지는 깃솔갓 아래는 침잠(沈潛)과 적요(寂寥) 마음의 평정(平靜..

그대는 누구입니까?

그대는 누구입니까? 청솔고개 그대는 누구입니까? 알 수 없나요? 낙우송 숲 채반 사이로 햇살 알갱이 쏟아지는 이 숲속에 홀로 가시렵니까? 가다가, 가다가 움막을 만나면 움막에서 하룻밤 자고 가고 가다가, 가다가 날 저물면 바위굴, 여우 굴에서 하룻밤 묵어가고 가다가, 가다가 집도 절도 못 만나면 옥수숫대, 짚베까리에서 하룻밤 목을 누이고 그러다가 별보다가 잠이 들고 가다가, 가다가 별도 달도 없는 밤이 오면 구름장을 이불 삼아 괴나리봇짐 팔베개하고 풍찬노숙 마다 않고 그냥저냥 서역 기행 떠나는 그대여!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별도 지고 내 육신도 지수화풍으로 홀홀히 지고, 지고 흩어지고 꽃이 피어있는 순간은 참으로 짧습니다. 꽃과 같이 피어 있는 그대의 시간도 너무나 짧습니다. 오, 홀로 가는 그대여! ..

두 갈래 길

두 갈래 길 청솔고개 당신은 어느 길을 걸으시렵니까? 여기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이렇습니다. 국가 정원 급으로 잘 꾸며진 숲길입니다. 위험 표지, 길 안내 모두 잘 돼 있습니다. 더군다나 휠체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반질반질하게 잘 다듬어진 데크도 있는 길입니다. 다른 한 길은 이러합니다. 표지판 하나 없이 그냥 그대로 나 있는 오솔길입니다. 그 길은 어디로 가는 지 그 종착을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울퉁불퉁한 돌 자갈 길입니다. 군데군데는 바위투성이입니다. 돌길입니다. 길에는 이끼가 덮고 있는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보이고 길 가 썩은 나무 등걸에는 벌레와 굼벵이가 구물구물합니다.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하시렵니까? 확 트여 바람 소리마저 시원한 전망 좋은 능선 길 좋아하십니까? 바람마저 고요히..

(詩) 소리들 外/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詩) 소리들 外 청솔고개 소리들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마음에 잠기는 소리, 마음이 잠기는 소리 더불어 마음이 흘러가는 소리, 마음에 들리는 소리, 내 마음의 소리... 햇살이 내리비쳐 내 마음에 들어오는 소리, 햇살을 맞이하는 내 마음의 소리 소리들...내 생애 처음 들려지는 소리 소리들 햇살 햇살알갱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땅의 거름이 되네오늘따라 그것이 내 눈에 보이네그 알갱이들은 뻗어 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네하늘을 덮은 낡고 닳아서 터진 채반 틈새로 걸러져서 마구 쏟아지네잘고 굵은 햇살알갱이들이 땅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네오늘따라 그것이 내 눈에 확 띄네만물이 살이 쪄가네 개미 산 흙에는 왕개미의 꿈틀거림, 강모래에는 잔 개미들의 고물거림 우리 집 구층 베란다 화분의 흙에 딸려들어..

(詩) 모든 흘러간 것들은 슬프다

청솔고개 아버지의 제자가단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러드렸다내게는 특별한 선생님이라고내게는 정말 특별한 담임선생님이라고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분이시라고 아버지가 가시고 난 후이런 이야기를 내가 들으니 왈칵 슬픔이 밀려온다그리움이 솟구친다아버지의 그런 제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아내가 울먹인다, 흐느낀다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한다아버지의 부재를 이제야 실감한다 아버지가 그립다사무치게 보고 싶다왜 그럴까, 왜 이리될까 아버지가 가신 후에 깨달은 것 하나 모든 흘러가 사라진 것은 아름답고 그립다슬프고도 애달프다아버지도 아버지와 이어진 인연들도 아버지와 나도아버지의 모든 것이 화악 한꺼번에 다가온다 내게는 하늘만큼 넓디넒은텅 빈 자리로 다가온다하늘의 천둥으로 남녘의 태풍으로 몰아쳐온다천둥에 ..

(詩) 꽃과의 대화/ 지는 꽃이 아름답다

(詩) 꽃과의 대화, "왜 말을 못하나요" 청솔고개 저만치 외따로 핀 꽃이 그립다몰래 핀 꽃잎 하나얼굴을 숨기고 있다 지는 꽃이 아름답다날리는 꽃잎이 더 곱다 흩어지는 꽃잎이바람 따라 쓸려간다물길 따라 흘러간다 꽃잎이 가는 길을물어본다 꽃길을 걷는다꽃이 손 흔든다 나를 보고살랑살랑하늘하늘 꽃 속에 묻힌다 꽃의 박수에 꽃의 환호에 취한다쓰러진다 꽃이 눈물 짓는다외롭다고 슬퍼한다말 걸어오지 않는다고늘 들러리라고 꽃가지는 잡으면서꽃 입술에 입맞춤하면서도 왜 말을 못하나요왜 말을 못하나요눈물 지으며 고백한다보고팠다고사랑한다고2023. 4. 20.

(詩) 빗속을 홀로/ 다시 혼자 걷다, 그 셋째 날 이야기, 빗물 고인 떡갈잎에는툭툭 빗방울 둥둥 심연에서 울리어오는 아득한 북소리

다시 혼자 걷다, 그 셋째 날 이야기 청솔고개 (詩) 빗속을 홀로 날은 이미 어둑어둑 산속 들어갈수록 찬비 세차게 퍼붓는다. 이 비 뚫고 다시 이 길 홀로 간다. 산으로 향하는 걸음걸음 다 나의 운명. 홀연 앞뒤 좇아오는 하얀 나비 하나 내 그림자 나의 영혼 골짜기 물에 일렁일렁 어리비친다. 문득 머리 위로 듣는 후드득 빗소리 내 등짝을 후린다. 가슴을 친다. 빗물 고인 떡갈잎에는 툭툭 빗방울 둥둥 심연에서 울리어오는 아득한 북소리. 아래 골에서 비 맞고 안개에 전 산비둘기 울음 구천으로 흩어진다. 새겨가는 내 발자국 내 발걸음 수를 세듯 더욱 천천히 일백 여덟 세면서 걷는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괜찮았는데 산행 초입부터 비가 제법 흩뿌린다. 우중 산행하면 문득 아이와 같이 간 지리산 산행 때가 생각난다..

(詩) 홀로 가는 길/ 바람을 만나랴 구름을 만나랴 설목(雪木) 사이로 새 한 마리 만나랴

(詩) 홀로 가는 길 청솔고개 마음이 어지러우면 산으로 향한다 산길을 걷는다 그 길은 늘 홀로 가는 길이다 조금은 외로운 길이다 고달픈 길이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 생각이 아득해지면 산으로 달려간다. 계곡 길을 걷는다 오솔 길을 걷는다 골바람을 맞는다 머리가 맑아진다 가을의 강물로 되어 가슴이 시리다 이 길 따라 가면 어디까지 갈까 가더라도 이고 갈 게 없구나 가더라도 지고 갈 게 하나 없구나 가더라도 두고 갈 게 없구나 가더라도 가더라도 내 남겨두고 갈게 하나도 없구나 다만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뿐 힘겹게 들이쉬는 내 생애의 숨소리뿐 홀로 가는 길 가면서 토해 낼 게 뭐 있더냐 한 생애의 헛기침 한 생애를 울리는 헛기침 한 생애를 토해내는 메아리 같은 울음 호올로 이 길 따라 가면 무엇을 만나랴 겨울나무 ..

(詩) 나무들의 갈기처럼/ 나무들의 구천(九泉)에서 하늘바람 타고 올라나무들의 구천(九天)까지 갈기돼 흩날리고

(詩) 나무들의 갈기처럼                                        청솔고개겨울에 깊은 한겨울에낙우송 숲을 찾아홀로 찾아차 한 잔 머금고눈을 감는다명상에 잠긴다길고 깊은 침묵이다대지와 나무의 깊은 호흡에바람도 숨결도 멎는다하늘 끝을 쳐다본다끄트머리나무들이 머리카락을 세우고 있다하늘 끝 감아 도는 겨울바람에머리카락을 곧추 세운다분노의 분출인가혼백(魂魄)의 흐트러짐인가나무들의 갈기가 흩날린다화가 머리끝으로 치미는가겨울 내내얼어 터지는 지상 만상(萬象)들의 울분 때문에머리가 꼰지서는 분기탱천(憤氣撐天)으로그리도치솟는가이제는나의 혼백(魂魄)도나무 되어나무들의 구천(九泉)에서하늘바람 타고올라나무들의 구천(九天)까지갈기돼 흩날리고 2023. 3. 5.

(詩) 회한(悔恨)/ 이번 생은 거의 망한 것 같다고 그러면 다음 생은 오는가 정말 오는가

(詩) 회한(悔恨) 청솔고개 그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천 번 만 번 되뇌고 만 번 천 번 이마를 찧어도 머리 감싸고 쥐어 뜯어도 모두 다 소용없는 일 모두 다 흘러 간 일 모두 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과거는 흘러갔다고 과거는 묻지 말라고 천 번 만 번 되뇌고 천 번 만 번 다짐하고 그래도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 나한테도 다짐하고 일기장에다 고백하고 꿈에서도 떠올리고 취해서도 떠벌리고 그래서 이생은, 이승에서는 이번 생은 거의 망한 것 같다고 그러면 다음 생은 오는가 정말 오는가 온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온다고 누가 언약이라도 했던가 온다한들 내가 알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알 수나 있을까 다음 생에 내가 태어난들 혹여 천만 분의 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