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혼자 걷다, 그 셋째 날 이야기
청솔고개
(詩) 빗속을 홀로
날은 이미 어둑어둑
산속 들어갈수록
찬비
세차게 퍼붓는다.
이 비 뚫고
다시 이 길 홀로 간다.
산으로 향하는
걸음걸음 다 나의 운명.
홀연 앞뒤 좇아오는
하얀 나비 하나
내 그림자 나의 영혼
골짜기 물에 일렁일렁
어리비친다.
문득 머리 위로 듣는 후드득 빗소리
내 등짝을 후린다.
가슴을 친다.
빗물 고인 떡갈잎에는
툭툭 빗방울
둥둥 심연에서 울리어오는
아득한 북소리.
아래 골에서
비 맞고 안개에 전 산비둘기 울음
구천으로 흩어진다.
새겨가는 내 발자국
내 발걸음 수를 세듯 더욱 천천히
일백 여덟 세면서 걷는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괜찮았는데 산행 초입부터 비가 제법 흩뿌린다. 우중 산행하면 문득 아이와 같이 간 지리산 산행 때가 생각난다. 수천가락의 빗소리가 후드득하고 나뭇잎 풀잎을 두드린다. 세차게 내려면 내릴수록 더 좋다.
낙우송 숲에서 비를 맞으면서 준비해가 빵으로 저녁을 먹고 마음이 급해 백팔을 셀 틈도 없이 바로 출발했다. 후줄근히 비 맞으면서 또닥거리는 빗소리를 신호삼아 백팔을 몇 차례 세 본다.
나의 세 살, 여덟 살, 열세 살,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아홉 살, 서른 살, 서른네 살, 서른다섯 살, 쉰여섯 살, 예순한 살……. 고비마다 내 삶의 역정이 떠오른다. 이게 나만의 명상 방식이다. 오늘은 산행 시간만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내려올 때는 아무래도 젖은 옷 때문에 살짝 한기가 느껴진다.
[2021년 초여름 어느 날, 2021. 6. 24.]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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