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나의 편지 90

(詩) 겨울에 만난 비/새벽에 일어나 빈 몸으로 밤길을 헤매면 언제나 어둠에 함빡 젖어 든 비를 만난다

겨울에 만난 비 청솔고개 새벽에 일어나 빈 몸으로 밤길을 걸으면 어둠에 함빡 젖어 든 비를 만난다 뼛골 깊이 고이는 서러운 시림에 따사한 체온이 엄마 품처럼 그리운 내 한 몸으로 인해 다만 천만 줄기 가녀린 빗살이 천만 순간의 인연을 얽어 짜고 노래한다 나는 작은 들새도 될 수 없고 더구나 황량한 산야의 한 마리 은빛 나는 노루도 될 수 없어 어느 미몽 새벽에 안개의 늪을 지나 해 뜨는 해변으로 아침노을을 찾아 갔으나 흐릿한 수평선엔 절망의 빗살들이 저주처럼 꽂히고 해변엔 핏빛 파도가 맹수처럼 검은 섬을 삼키고만 있었다 자꾸만 갈라지는 나 홀로 선 모래밭에는 끝없이 떨어지는 아득한 침몰 뿐, 나는 연방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은 일체를 빨아들이고 걷힐 줄 모르는 빗살과 더불어 다가오나니 버려진 ..

(詩) 바다의 소녀/구원이란 너와 나의 마주 잡는 손에서

바다의 소녀 청솔고개 덧없는 절망의 늪에서 자꾸만 심연으로 침몰하는데 소녀는 이슬을 먹고 자란 선녀처럼 나의 옷자락을 잡는다 삶이란 언제나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사랑이란 너와 나의 스치는 옷자락에서 구원이란 너와 나의 마주 잡는 손에서 너의 열기어린 손에는 언제나 한줌의 진주 [1978. 12. 진중에서] 2020. 12. 9.

(詩) 겨울이야기/꿈결처럼 아련히 멀어져가는골짜기의 등불

겨울이야기 청솔고개 꿈결처럼 아련히 멀어져가는 골짜기의 등불 호이 호이 황량한 산하에서 굶주린 이리들의 울음소리 스러져가는 마지막 별빛도 외려 은빛으로 현란히 빛나고 메마른 산야는 슬픈 모습으로 그림자처럼 흐르는 영혼들의 안식 눈 덮인 언덕 아래 깊은 땅속에는 태초의 생명들이 새록새록 잠들고 서산머리에 걸린 서늘한 초승달 이 계절의 환상 마른 겨울 이야기 [1976. 겨울] 2020. 12. 8.

(詩) 겨울날/천상의 연회장처럼 숱한 촛대에서 일시에 불이 밝혀진다

겨울날 청솔고개 아카시아 나무의 등걸 위로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한 떨기 찬바람 산은 더욱 그 안온한 순수로 그 자리에서 존재하고 직립하는 강마을의 파아란 연기가 낮 안개 새로 어둠에 드리운다. 육지 孤島에서도 역광으로 부서지는 태양은 있단다 하늘 아래 그 동네 해발 400미터 다시는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유형지를 창살 없는 감방처럼 내 존재의 모두를 영어시켜도 그래도 신은 최초의 은총을 허여하시어 정수리를 비추는 상오 11시의 역광 천상의 연회장처럼 숱한 촛대에서 일시에 불이 밝혀진다 [1980. 12. 19] 2020. 12. 7.

(詩) 사랑법 연습/다만 내겐 슬픔으로 난 작은 길 하나 뿐그 길 속에 내가 갈잎처럼 홀로 서 있다

사랑법 연습 청솔고개 다시는 손잡지 않으려니 고운 소매 天上의 나의 仙女여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겨울로 난 들길을 울음 울으며 달려 나가지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절망의 바람일 뿐 어디에선가도 사방을 훠어이 훠어이 둘러 봐도 그 얇은 옷자락은 뵈지 않아 슬픔만 엮으며 엮으며 어딘가 한 잎 뚝 떨어지는 연 잎 한 잎 고통을 이기고 나를 따른다. 다시는 배우지 않으려니 사랑법 이기며 위안으로 가는 길 구원으로 가는 길을 끝없이 걷다가 또 걷다가 바라도 보아도 또다시 이어지는 사랑법 연습 다시는 손잡지 않으려니 고운 소매 나의 天女여 이룰 수 없는 나의 사랑 다만 내겐 슬픔으로 난 작은 길 하나 뿐 그 길 속에 내가 갈잎처럼 홀로 서 있다 [1980. 12. 19] 2020. 12. 6.

(詩) 겨울 호수/싸한 향내 메밀꽃처럼 설화가 피어난 그 언덕으로.......

겨울 호수 청솔고개 영아 밤마다 은빛으로 흐르는 강을 보아라 너의 영혼의 둥지가 어디메쯤 홀홀 떠나가는지 영아 이승은 서러운 사바세계 오렴 열풍처럼 몰아치는 오뇌의 잔해들을 너의 찬 눈물방울로 헤뭉개 버리고 이윽고 은하 빛 명멸하는 그 호수의 가장 깊은 곳 너의 영혼은 한줌의 잿봉지 되어 어디로 흐르는가 영혼들이 호곡하는 소리 너는 듣는가 한 마리 나비처럼 눈 쌓인 그 언덕으로 날아가려는가 영아 겨울 수선화가 눈 쌓인 언덕에 만발해 있는 그해 겨울 호수로 싸한 향내 메밀꽃처럼 설화가 피어난 그 언덕으로....... [1976. 12. 진중 언덕에서] 2020. 12. 5.

(詩) 서설(瑞雪)/내 20대의 마지막 계절에진한 눈물처럼눈이 내린다

서설(瑞雪) 청솔고개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내 20대의 마지막 계절에 진한 눈물처럼 눈이 내린다 야윈 발목으로 내 온 몸이 짓누르는 숨찬 삶의 무게에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벌판에서 내 20대의 메마른 벌판에서 훠어이 훠어이 쉰 목청 돋구며 홀로 서 있는데 내 20대의 밤은 깊어 가는데 머얼리 산골짝에 빤한 등불에는 탐욕스런 웃음이 얼음장처럼 퍼져나가고 눈 내리는 벌판 오가는 사람하나 없다 끝을 알지 못하는 바람이 눈물 얼어붙은 내 야윈 안면을 할퀴고 가면 길 갈 수도 없는 절망의 매서운 벌판에서 은하처럼 얼어붙은 피곤한 영혼의 그림자 그 남자는 가슴앓이 문학청년 그의 사랑하는 사람 하나 요오꼬가 기억납니다 차창에서 그녀는 그를 떠나보내고 있었지요 정거장 플랫폼에는 마침 서설이 내리고 그들을 ..

(詩) 겨울에 만난 비/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체온의 뜨거운 열기로이제 어둠의 그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겨울에 만난 비 -초병의 넋두리 청솔고개 새벽에 일어나 빈 몸으로 밤길을 걸으면 어둠에 함빡 젖어든 비를 만난다 뼛골 깊이 고이는 서러운 시림에 따사한 체온이 엄마 품처럼 그리운 내 한 몸으로 인해 다만 천만 줄기 가녀린 빗살이 천만 순간의 인연을 얽어짜고 노래한다 나는 작은 들새도 될 수 없고 더구나 황량한 산야의 한 마리 은빛 나는 노루도 될 수 없어 어느 미몽 새벽에 안개의 늪을 지나 해 뜨는 해변으로 아침노을을 찾아 가서는 흐릿한 수평선엔 절망의 빗살들이 저주처럼 꽂히고 해변엔 핏빛 파도가 맹수처럼 검은 섬을 삼키고만 있었다 자꾸만 갈라지는 홀로선 모래밭에는 끝없이 떨어지는 아득한 침몰뿐 나는 연방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은 일체를 빨아들이고 걷힐 줄 모르는 빗살과 더불어 다가오나니 버려진..

(詩) 폐원(廢園)/슬픈 영토에서 폐원에서 갈 곳을 잃고 부랑한다

폐원(廢園) 청솔고개 뜰에는 스러져 가는 빛깔뿐 꽃잎은 없다 흙이 마르고 얼어붙어 허무한 냄새 싸아한 바람 냄새가 난다 마른 목련 가냘픈 라일락 서걱이는 감이파리 아, 정든 나의 가족들 나의 자식들 꼬질한 앵두나무를 마주하면 자리보전하신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난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 꽃들의 미소는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나 어디에선가 어디에선가 바람 따라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그 함성은 내팽개쳐진 영혼의 절규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이리 부랑하는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아득한 유년의 꽃밭 민들레 씨로 퍼뜨린 상념의 씨를 주워 담는다 한 닢 은전 민들레송이에 실린 연둣빛 꿈 삭은 울타리에 무리지어 오는 약속도 없는 멧새의 자취는 없고 아아, 낯 술 취해 울부짖는 가여운 행려병자는....... 슬픈 영토에..

(詩) 高地에서/ 마른 내음 한줌 바람에 서걱일 뿐

高地에서 청솔고개그 여름의 녹색 호수가 보일 것 같아한숨 몰아쳐 자리 잡은내 마음의 한 뼘 뜨락에는 이제 마른 내음 한줌 바람에 서걱일 뿐절망의 뿌리조차도 뽑혀나고 뿌리 없는 티끌이 바람에 날리는데 내 초라한 육신에 내리 붓는한아름 도타운 양광순간 은백양처럼 화사한욕망은 내 몸을 꿰뚫고 정수리로 빠져나가려나그 여름 호수가 보이는내 마음의 한 뼘 뜨락에는 마른 바람만이 일렁일 뿐[1978. 11. 9] 2020.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