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나의 편지 90

(詩) 兵村/젖은 손을 호호 불며 다시 보는 새벽하늘

兵村 청솔고개 이십대들의 욕망들이 밤마다 한 이불 아래에서 진통한다. 보름에 한 번씩 비추이는 만월 그 얼굴에 새겨지는 인연한 많은 모습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은 우리들이 저어가는 苦海에서 가장 광포한 뱃길 새벽마다 별이 찬연한데 가슴을 짓누르는 외로움에 꽃처럼 피어나는 새벽안개 그리도 차갑던가 고향 하늘이 저긴가 자꾸만 자꾸만 높게 오르는 발 길 한 허리 굽어 펴도 다시 한 번 고개 돌려 보는 고향 하늘 젖은 손을 호호 불며 다시 보는 새벽하늘 [1978. 가을 진중에서] 2020. 11. 8.

(詩) 떠나는 심사(心思)/바람개비로 곤두박질하여

떠나는 심사(心思) 청솔고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라 그러자면 남은 한 방울의 눈물마저 말려 버리면 될 거야 흐느낌마저 죽이자 창으로 내다보면 내가 탄 열차는 너무 느리다 바람개비로 곤두박질하여 뛰어 내리려나 곡소리 차창에 반향 하여 퍼져나는 곳 얼음처럼 투명해진 차창에 내 그림자는 무게 없이 더욱 뚜렷한 윤곽인데 바람은 날 바람은 하늘에서 불어드는데 바람을 타고 수껑 같은 하늘에서 비가 감기운다 찰싹 감겨드는 머리카락 젖어서 흙덩이로 헤뭉개진다 차라리 귀를 막아 버릴까 여봐요, 그대는 어디로 가느뇨? 눈을 감는다 아 취한 것처럼 비틀거려도 좋은 곳 주인 없는 섬 늘 푸른 원시림 모난 바위 풀 뜯는 사자 떼 입 맞추는 곳 우리는 밤새 표류하다가 언제 그 이름 없는 부동항에 정박하려나 [1974년 11월]..

(詩) 가을에/식어가는 太陽의 끝 계절에는

가을에 청솔고개 그때는 열화로 타오르는 작은 가슴을 풀어 헤치고 여읜 몸뚱이를 그 샘물에 서늘히 적시고는 이윽고 잠들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깨어나서 어디론지 하염없이 떠나가야 할 계절 한 푼의 여비도 없이 길 가야 하는데 나는 脫盡하는 몸매로 주저앉아야 하나 한 점의 빛깔도 어둠으로 뒤덮인 눈먼 어부처럼 그 자리에 식어가는 太陽의 끝 계절에는 축제의 뒤뜰처럼 허허로운 얇은 양광의 무수한 화살이 내 빈 가슴을 헤집고 빠져나가 어디론지 어디론지 사라져 가고 있다 내 실존의 작은 무덤에는 덧없는 밤이 이어지고 꿈도 아니고 꿈 아닌 것도 아닌 분노 같은 응어리가 새벽마다 夢精을 한다. 가슴에는 빛의 칼을 품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어둠의 모가지를 단죄하기 위해서 뜨거운 눈물로 시퍼런 날이 서도록 갈아도 심연 속에서..

(詩) 시작(詩作)/어느 가을아침 무서리에 사위어진 들풀내음

시작(詩作) 청솔고개 밤새 울부짖듯 쉬인 목청으로 하소하는 悲願을 들으시는 觀音처럼 되게 하소서 저의 노래가 짚자리 깔고 누우면 뚫어진 문틈으로 밤별이 총총 들고 감잎 서걱이는 뜨락에는 안개처럼 바람처럼 깔리는 향 내음 있어 혹 어느 紅顔의 比丘尼가 숨겨 신은 玉色 고무신 끄는 소리가 되게 하소서 저의 노래가 이리도 서러운지요 님의 옷소매 끄을 적에 실핏줄 바알간 千手로 어루만지는 天上으로 이어진 七寶 무지개다리 사뿐히 건너지고 재 너머 芙蓉池 연잎에 고이 내려놓으라는 말씀 그처럼 되게 하소서 한 많은 한 세상에 허위허위 流轉할 제 어느 가을아침 무서리에 사위어진 들풀내음 바람처럼 되오리다 향 내없는 저의 노래가 [1980. 11.] 2020. 11. 4.

(時調) 들국/玉빛 그대 光芒 들 이슬 머금어도

들국 청솔고개 한 하늘에서 호올로 저리 슬피 울먹이랴 남 갑사 자주고름에 옥색고무신 멍울진 가슴이사 九泉에사 피우리라 별빛이라 잠재우랴 바람이라 안아주랴 그대 恨 백 필 명주 이리도 질기더뇨 無名草 피어나서 들국이라 이름 하니 玉빛 그대 光芒 들 이슬 머금어도 손닿음 저어하여 수줍게 아미 숙이니 어쩌다 맺은 연분 이리도 모질더뇨 굽이굽이 거친 風霜 설운 이름 들국아 송이송이 맺힌 恨은 들풀 내음 바랜 향내 한세상 허어위 허어위 바람처럼 구름처럼 [1983. 가을] 2020. 11. 2

(詩) 無明의 목소리/부르는 소리밖에 남기고 갈게 없구나

無明의 목소리 청솔고개 촛불을 밝혀야 하리 이제는 슬픈 세월의 앙금 속에서 遊女처럼 헤픈 몸뚱리로 流轉하는데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안개 비단 길 꽃 저편 선인장의 가시처럼 찔리우는 理性의 그 고통스런 견책(譴責) 손을 잡아야 하리 어린아이처럼 밝게 비치는 실핏줄 속의 따스함은......... 한때는 열화처럼 타오르던 심장의 고동마저 그 가을 무서리에 절인 무 이파리처럼 숨죽이고 어디로든지 어디로든지 비인 가슴 부여안고 떠나야 하리 그 깊은 탄식을 한 허리에 모두고는 진비 뿌리는 새벽 가을에 끝도 없는 석조 계단을 오르며 오르며 결코 주저앉지는 않으리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몹쓸 끝없는 미망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假花 어느덧 총명한 눈망울에는 욕망의 기름이 번들거리고 문득 뜨이는 원죄의 恥態 無明..

(詩) 無明의 바다/바다는 운명이다 절망이다

無明의 바다 청솔고개 한 때는 너를 사랑하였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이제는 내게 무명의 바다 그 너머에 또 다른 나라가 극락 같은 데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손잡고 그 무명의 바다를 에워싸면 바다는 즐거워할까 춤을 출까 바다는 어둠이다 바다는 운명이다 절망이다 바다로 그 무명의 바다로 가는 길섶에는 갈잎이 세로로 쓰러지고 어디선가는 바람이 와서 모르는 새들을 떨어뜨리는데 여전히 피어오르는 짜릿한 갯내음 무명의 바다 [1980. 10. 12. 노래한 것임] 2020. 10. 12.

(詩)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이유/가슴에 금을 내고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이유 청솔고개 보라색 香煙이 깊은 가슴속에서 짜릿한 경련으로 피어 올 때면 나는 몹쓸 놈의 우상입니까 당신한테는 두 손을 모두어 발기발기 쥐어뜯고 문드러진 살점 밝아내어 짐승 같은 몸짓으로 상처 난 앞발을 모두어 봅니다 가슴에 금을 내고 피맺힌 울음으로 꺼억꺼억해도 바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비극의 이 밤이여 손을 잡아야 하나요 이제는 막대 같은 당신의 손을 [1980. 가을] 2020. 10. 11.

(時調) 구슬령/은자처럼 잠들거나 산새처럼 울을 거나

구슬령 청솔고개 담배 꽃 천 리라도 피어나는 구슬령 한 허리 아흔 구비 한도 많고 말도 많소 차라리 뜨는 해 보며 웃음처럼 울어 보랴 은자처럼 잠들거나 산새처럼 울을 거나 구름 서리 피어나는 구슬령 이 고비 길 황천길 아니라더뇨 천상으로 피어나네 백옥 같은 너의 얼굴 옥반 구슬 네 목소리 한은 잘룩 허리 응혈처럼 맺어지고 소리개도 쉬어 가나니 구비 구비 구슬재 [1980. 10. 12. 구슬령을 지나며] 2020. 10. 10.

(詩) 뜨락에서/목이 하얀 나의 선녀가 달처럼 나를 보고 있다

뜨락에서 청솔고개 그것은 소리 없이 지는 오동잎이 아니어도 좋다. 독경이 깔리는 禪寺 작은 뜰에는 이제 차가운 비에 젖어드는 연두 빛 바랜 감잎이 서걱이는데 九泉에서나 만나려나 미지의 저쪽 슬픈 영토에 사는 나의 仙女여! 비단 옷이 아니라도 좋다. 三更을 지새우는 귀뚜리의 울음소리가 없어도....... 향내 없는 몸뚱아리로 날개 없이도........ 한 하늘 하며 살아간다는 그것하나라도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이다 모든 것은 절망 같다 절망은 절망을 낳고 절망을....... 가없이 절망을 퍼내는 두레박은 하늘 끝에서 땅 끝까지 생명줄처럼…… 아아, 황량한 대지에는 목이 하얀 나의 선녀가 달처럼 나를 보고 있다 자꾸만 [1979. 10. 12. 普光寺 禪房에서 한 아이에게] 2020.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