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순수(純粹)가 순수(純粹)에게 2

청솔고개 2023. 1. 1. 12:05

                                                                      청솔고개

   50년이 더 지난 이제는, 한 순수가 어떤 순수에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좀처럼 회복될 수 없음을 내 생애 닥친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순수라는 감정의 과잉 노출이 치기(稚氣)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지만, 나의 20대 초반 그 내면에 닮긴 정신만은 진실이었음을 감히 증언한다. [‘경아’는 당시 야학에서 내가 담임한 학급의 50여명 학생 대표로, 편지를 받는 가상으로 설정한 아이 이름임. 1975년 2월 말, 나의 사범대학 졸업, 발령과 더불어 야학을 떠남에 즈음하여 남긴 편지임. 1974년 겨울, 야학 문집에 실렸던 것으로 새로 실으면서 조금 다듬었음. 2023년 신년을 맞으면서. 2022.1.14.의 1편에 이어서 2편으로 이어짐.]

꿈속의 소녀 경아에게 2

   나는 이 겨울에 밤새도록 미로(迷路)로 엉긴 이 도회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맘껏 걸어보고 싶구나. 우리들의 꿈이 서린, 이 도회의 공기를 지치도록 호흡해 보고 싶다. 걷어진 커튼 틈으로 보인다. 창 밖에서 외롭게 떨면서 꿈을 부여잡고 있는 저 겨울나무.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싶다. 마른 겨울나무는 소복이 쌓인 눈덩이로 따스한 솜옷을 입고 있다. 이제 추적거리며 눈덩이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여기서 쌓은 많은 추억거리를 회상해 본다. 깊은 상념에도 젖어본다. 내가 맨 처음으로 경아와 같은 눈을 가진 많은 아이들을 맞이하기는 지금부터 꼭 3년 전 늦봄. 난생처음 그 많은 아이들 앞에 섰을 때, 샛별로 빛나는 백여 개의 눈망울에 나는 처음에는 얼떨떨했으며 다시 심하게 떨렸었고 나중에는 더없이 행복했었다.

   나는 경아 같은 아이는 아름다운 꿈을 가져야한다고 자주 말해줬지. 꿈이 없는 경아는 생각할 수도 없었어. 양초가 자기 몸을 스스로 태우면서 빛을 발하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꿈을 살라서 생명의 불꽃으로 밝혀야 한단다.

   눈기운 머금은 북풍한설이 문풍지를 떨게 하는 밤이지만 함박눈은 포근해서 경아가 쓰고 있는 하얀 털모자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경아! 네가 미소 띨 때 드러나는 하얀 이는 진주알 같이 가지런하다. 그래서 그 미소를 살짝 훔쳐보았단다. 겨울 저녁 그 언젠가였었지.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골목길에서 너와 함께 좀 타버린 군고구마를 같이 나눠 먹은 적이 기억나니? 나는 탄 고구마로 그을음이 묻은 너의 입술이 너무 우스워 아프리카 토인들 같다고 놀려주었지. 그러면서 내가 배를 잡고 허리가 아프도록 웃으니까 너도 덩달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선생님 입술과 이빨은 꼭 낮도깨비 같아요!”하고 간신히 말하더군. 내가 이런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있을까? 그 때문에 너의 새하얀 치열이 더욱 귀엽고 가지런해 보였단다.

   경아! 수업시간에 내가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하는 걸 기억하고 있는지? 어떤 시인은 그래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한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노래했지. 이제 우리의 헤어짐이 결코 영원한 결별이 아니라는 확신을 다짐하고 싶구나.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쳐야 할 것 같구나. 그렇지만 너의 작고 여리며 참한 얼굴이 자꾸만 어리어 온다. 그 모습이 마치 창밖에서 밤을 새워 내리는 가녀린 눈발 같구나. 그래서 차마 내가 필을 놓을 수 없구나. 교실이든 운동장이든 어디서든 경아의 해맑은 얼굴을 대하면서도 눈짓과 미소에 그늘이 지는 걸 가끔은 보았지. 무엇이 경아로 하여금 슬픈 미소를 띠게 하는지? 많은 생각이 든다. 나이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우리가 이제 작별한다고 생각하니 못 다한 이야기, 우리 앞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밤새워 다 해버리고 싶다. 철새들이 떠나야 할 때를 알아 오듯이, 훨훨 떠나듯이 나도 이제 왔다가 경아를 두고 떠나야 할 것 같다. 틈 많은 내 방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을 커튼으로 여미고 따스한 아랫목에서 이제 나도 꿈나라로 가야 할 것 같구나. 밤이 깊어간다.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꿈, 용기, 사랑만큼은 잃지 말자.

   먼 훗날 언제 우리가 다시 운명으로 만나게 되면 오늘밤처럼 눈 내리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흰 눈의 순결함을 얘기 하자꾸나. 따스한 군밤처럼 포근한 사랑을 노래하자. 나는 경아를 위해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에 맞춰 기도할게. 이제 새벽이다. 너의 초롱 같은 눈망울을 접고 밤 눈 내리는 고요한 꿈나라 여행하렴. 잘 자렴. 우리 경아, 안녕! [1974. 12. 17. 새벽. 제자를 아끼는 선생님으로부터.]      2023.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