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순수(純粹)가 순수(純粹)에게 1

청솔고개 2022. 1. 14. 23:55

                                                                                                        청솔고개

   다음은 나의 이십대 중반, 야학 교사를 하면서 한 순수와 순수가 만나는 장면을 설정하여 보낸 서간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 어린 순수를 향한 나의 메시지가 너무 감성과잉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당시 내가 생각하는 순수의 전형을 나름 형상화한 것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과잉 정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순수가 실종되는 시대에는 이런 순수감성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심경이다. 어떤 곳은 나의 치기(稚氣)어린 가르침이 생경(生硬)하게 드러나 있고 어떤 곳은 내가 생각하는 순수의 원형을 그려낸다고 애쓴 흔적도 보인다. 48년 전에 내가 가장 추구하는 순수의 원형이 무엇인지 이 감정과잉(感情過剩), 치기 넘쳐 보이는 표현을 통해서 이를 다시 회상할 수 있음은 나의 행복이다.

 

꿈속의 소녀 경아에게 1

 

   그리운 경아!

   벌써 차가운 겨울이구나. 그 동안 잘 있었니? 지난 번 방학식 때 교실에서 포근한 벙어리장갑을 끼고 빨간 볼을 한 너의 모습이 못내 내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 어린 아이의 모습이 채 가시지도 않는 너의 얼굴은 언제나 이슬처럼 맑아 보이더구나.

   경아.

   이제 어려움 많았던 올해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나는 일 년 내내 하릴없듯이 멍해 있다가도 한해의 막바지가 되면 이렇게 무연히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숙연해지는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본단다.

   이제 경아는 꿈 많은 열 살 좀 더 지난 소녀. 그리고 나는 경아 또래를 지켜주는, 아직은 부족함이 많은, 설익은 선생님. 그래도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의 진실함이 오갈 수 있는 사제지간이라서 나는 행복하다. 흔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는 많이 어렵다고도 하지만, 우리들은 더욱더 인간적인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 더욱 진실된 대화의 길을 터놓아 가면 좋을 것 같아.

   경아는 아직 10대의 중반으로 가는 어린이의 세대, 나는 20대. 우리는 더불어 무엇을 꿈꾸고 대화해야 될까. 경아는 나에게 할 말이 참 많을 거야. 예를 들면, 우리 선생님은 너무 웃지 않고 표정이 굳어 있다든지, 화를 잘 낸다든지 하는 등, 불만이 많을 거야. 내가 참으로 미안해. 우리 경아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내가 화도 잘 내고 부족함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선생님은 아직 흠결이 많은 사람이고,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할 경우도 많아. 그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살그머니 고개를 들 때가 있어. 총명한 경아가 이런 선생님을 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경아와 같은 아이들을 심하게 꾸짖고는 뒤돌아서서 괴로워서 마음속으로 많이 자책할 때도 있는 걸 경아는 잘 모를 거야. 그러나 곧 경아와 같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매를 보면 바로 용기와 희망이 되살아나. 경아와 같이 착한 아이들로 인해 나는 용기를 되찾는단다. 이런 경아와 같은 아이들을 속으로는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몰라.

   경아.

   지금은 밤이다. 하늘에서 밤의 아름다운 정령들이 대지의 나무들과 더불어 꿈과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한 아름다운 겨울밤이다. 언젠가 우리는 책에서 가없이 무수한 영혼들이 밤만 되면 연기처럼 되어 밤하늘의 뭇별에 하나씩 사뿐히 내려앉아 자리 잡는다고 읽은 적이 있었지. 이 밤처럼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밤에는 길 잃은 영혼들이 잠들 뭇별들은 어디론지 아득히 숨어버린다. 밤하늘은 더욱 쓸쓸하다. 경아, 너의 영혼이 잠 들 별은 어디쯤 있을까. 경아의 별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씨가 고운 경아는 용기 잃은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어서 그 별은 가장 빛날 거야.

   경아! 이렇게 창 밖에는 펄펄 눈이 내리는 밤이 되면 눈처럼 순결을 머금은 경아의 모습이 날개옷을 입은 천사처럼 훨훨 날아서 내게 다가오는 것 같구나. 경아, 내가 눈 내리는 뜰에 나가 손이 빨개지도록 눈을 돌멩이처럼 단단히 뭉쳐서 경아가 잠자는 머리맡에 살그머니 다가가서 경아의 빨갛게 홍조 띤 볼에 살짝 대면 경아는 어떤 모습을 할까. 생각만 해도 경아의 표정이 우스울 거야. 경아는 그 동그란 눈을 깜빡이면서 놀란 참새처럼 나를 쳐다볼 거야.

   경아! 경아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 눈 내리는 겨울밤을 보내고 있을까? 눈이 오는 밤이면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고 사방은 적막으로 가득 차게 되지. 나는 이 눈 오는 밤길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면서 발이 푹푹 빠지도록 걸었단다. 장난기 어린 한 아이가 내 등 뒤로 다가와서 감쪽같이 뭉친 눈을 등덜미에 갖다 넣고는 등을 탁탁 두드리더군. 나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얼굴만 찡그리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버렸단다.[1974년 겨울, 야학 문집에 실렸던 것임. 이어서 2편이 있음]    2022.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