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야학 활동 회상 2
청솔고개
꿈동산의 가을은 여름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수돗가 등나무 넝쿨, 운동장 가의 수양버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려운 꽃동산 식구들은 벌써 겨울채비에 마음 졸여야 했지만 가을은 그래도 추억의 계절이었습니다. 꿈동산의 겨울은 눈이 오면 더욱 신이 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고 교실이며 기숙사며 온통 눈싸움으로 눈투성이가 되지요.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순수해집니다. 입구 골목길에 군고구마와 군밤, 따끈한 찐빵이 더욱 인기 있는 철입니다. 이때쯤은 벌써 뜨뜻한 동태국물에 막걸리 한 잔 걸쳐 취한 몇몇 선생님들이 노변에서 대학가의 에피소드, 시국의 흐름, 꿈동산학교의 제반 문제점 등에 대한 소탈한 정담으로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꿈동산학교의 시장 골목은 더욱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벌써 그 골목을 찾은 지가 수년이나 흘렀으니 어떻게 변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지금도 꿈동산의 그 가을, 겨울의 정경이 눈에 선히 어립니다.
특히 가을 들녘의 산책 추억은 더욱 나를 애틋한 그리움의 세계로, 다시는 갈 수 없는 아득한 유년의 세계로 끌어가는 듯합니다. 아이들과 같이 앞산 언덕에 올라서 함초롬한 들국화 덤불이며 이름 모를 들풀 내음하며, 색색으로 물든 낙엽을 벗 삼아 내일의 꿈과 무한히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함께 간직하면서 노래 부르고 글 짓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꿈동산은 너무나 아늑했습니다. 교정의 수목이랑 운동장이랑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지요.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서 봉직하면서도 야학 꿈동산만큼 이상적이고 순수한 교육의 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역할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과 제자들의 학교생활 자체가 참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롭고 활발하고 순수한 대화의 장이 항상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명예도 보수도 이해관계도 순수 그 자체로 가르치려는 열정이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 역사 차원 높은 순수성이 전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선생님과 대화할 수 있고 일상생활 자체를 통해 한 가족과 같은 결집된 생활을 함으로써 순수한 의식을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 오기를 즐겨합니다. 좁은 꿈동산이지만 그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맘껏 뛰어 놀고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소중한 공간을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한국 교육 풍토에서 볼 때 하나의 파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숙사 선생님의 방에 책도 빌려 보고 음악도 듣고 선생님의 잔심부름, 기타 일도 거들어 드리면서 산교육을 체험하였습니다. 사회보호시설에서 다니는 학생들 중에서도 하나 구김살 없이 학교생활을 하며 더없는 순수성을 잃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지요.
나의 야학 봉사 시절의 마지막 해인 74년 그해 나는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학급 구성을 살펴보니까 사회보호시설에 다니는 학생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보호시설에서 다니는 학생들의 실태는 경영자의 양식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 원의 학생들은 이미 학교생활 및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부적응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해서인지 모두들 허약해 보였고 더욱이 힘든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성격적으로 우울하며 폐쇄적이어서 나를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을 회피하곤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능력껏 최선의 지도를 다한다고 했지만 당장의 지도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내가 그들을 위해 잘할 수 있었는데 나의 정성과 사랑이 너무나 부족하지 않았던가 하는 회오가 듭니다. 뿌리 깊은 피해의식 때문인지 나를 멀리하는 데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때가 많았답니다. 어언간 우리의 대학 졸업 날이 다가왔습니다. 야학에서는 그렇게 회피만 하던 그들의 대부분이 우리들을 축하하러 대학 교정에 몰려왔을 때 나는 그들의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75년 2월 25일 우리들의 졸업식 때 보여준 그 제자들의 축하 열기는 가히 대학 교정을 뒤덮고도 남았습니다. 졸업 선생님들의 이름을 쓴 현수막을 설치한 두 대의 손수레를 준비해서 우리들을 태우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로터리 교사 주변을 누비던 그 환호와 축하의 열기에 가슴이 뭉클했지요. 수많은 어린 제자들이 꼭 쥐어 주는 손수건 한 장 한 장, 꽃 한 송이 한 송이. 아, 정말로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선물을 내미는 그들의 손이 수줍은 듯, 얼굴 붉히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구한 가슴 가슴, 마치 자기 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얼굴 얼굴들. 그 순간 내 아무리 정해진 교사의 길을 찾아 꿈동산을 떠나야 한다지만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이 글은 ‘야학 50년사’에 실은 글을 일부 정리한 것임] 2021.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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