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 6. 16. 토,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6시. 거의 한 두 시간 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밝아진 아침입니다. 좀 더 일찍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산사의 계곡을 산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더군요.
아침 식사 후 가야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가야산은 골골마다 초로(草露)요, 봉봉마다 부운(浮雲)입니다. 이름도 모를 뭇 새들이 인적에 놀란 듯 푸드득거리고 있습니다. 산길 오솔길마다 산딸기가 퍽 탐스럽게 달려있습니다. 나도 후드득 떨어지는 물 길, 돌아 흐르는 물, 바위틈으로 숨는 물길 따라 흘러가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은 숨은 가빴지만 정상을 향해 오르는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거의 다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보니 봉마다 뽀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갸름한 봉우리의 윤곽이 신령스럽습니다. 온 천지는 부운에 쌓여있습니다. 먼 곳은 희미하게 흐려진 윤곽만 드러나 있습니다. 마치 태고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 같았습니다. 역사의 시원(始元)에 대한 영감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10시부터는 다시 선생님과 같이 해인사 본전, 장경각(藏經閣)에 보존돼 있는 팔만대장경판을 둘러보았습니다. 먼지가 묻은 경판(經板)도 살짝 만져 보았습니다. 생애 다시는 해 볼 수 없는 멋진 체험이었습니다. 아무나 이렇게 여기서 직접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오랜 세월동안 팔만대장경판 연구에 진력하신 선생님의 후광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 숱한 역사의 질곡(桎梏)을 이기고 이렇게 오롯이 보존돼 있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습니다. 고려 시대 우리 민족의 서원(誓願)이 결집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팔만대장경의 친견에서 우리 선조님들의 불심의 정수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획 한 획 글씨 새김이 그분들의 피와 눈물 같은 비원이 서려 있었습니다. 본전에서는 지월스님의 49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스님들과 대중들이 예식을 엄수하고 있었습니다. 경내를 흐르는 향내가 생전의 당신의 품격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이어서 학사대[陜川海印寺學士臺]에 들러 고운 선생의 자취를 살펴보았습니다.
점심은 산나물 반찬이 주가 되었습니다. 맛이 좋았습니다. 오후에는 삼선암, 자족암, 회랑대, 석굴암, 이수정 등 해인사의 명소를 두루 찾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희랑대였습니다. 천애의 절벽 밑으로 꼭 제비집 같이 세워진 곳에는 담쟁이가 얼기설기 엉기어 있었습니다. 희랑대 바위위에서 내려다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속기(俗氣)는 모두 저 멀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기어진 듯했습니다. 심신은 청정 그대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한 송이 꽃처럼 흩날려 보내고 싶어집니다.
오후 3시쯤 홍제암을 떠났습니다. 종성스님을 만나서 합장으로 이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검어진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한 줄금 비가 퍼 부울 듯 보였습니다. 홍류동으로 가려고 했으나 또 비가 내려서 그대로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쉬워진 마음으로 멀어지는 인연의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차는 어둠의 길을 꼬불꼬불 기어가듯 헤쳐가고 있었습니다. 멀어져가는 뽀얀 산야에서는 더욱 깊어진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산의 윤곽에서는 어떤 슬픔, 연약함, 알 수 없는 우수, 신비함이 보입니다. 이 시간 가장 아쉬운 것은 멀리 톱날처럼 윤곽을 하고 있는 가야산 정상을 결국 밟아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영상에서 본 듯한 헬리콥터 날개소리에 토끼들이 갈 바를 모르는 가야산 정상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도착하여 단골주점에서 몇 잔의 술로 그간의 객고와 아쉬움을 달래면서 헤어졌습니다. 2022.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