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다시 유월 2, 내 생애의 어느 하루 1973. 6. 15. 금, 2

청솔고개 2022. 6. 2. 23:01

                                                                                                         청솔고개

   여기서 낮에 만났던 종성스님을 또 만났습니다. 고답(高踏)한 맛이 덜한 게 어떤 면에서는 퍽 호감이 가는 스님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두운 계곡을 끼고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종성스님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두 번이나 환속했다가 다시 들어오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그 스님은 내일 지월스님의 49재(齋)를 올린다고 몹시 바쁘다고 했습니다. 산사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후줄근하게 더운 낮의 날씨와는 달리 춥고 선선한 느낌이 듭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새로 비치는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내가 여기 해인 계곡에서 이러한 송간지명월(松間之明月)을 마주하게 되는 것도 영겁에서 한 찰나, 어떤 인연이 아닐까요? 순간이 곧 영겁(永劫)임을 알게 되니, 그래서 나의 무한한 감루(感淚)의 이 밤입니다. 어디서 뻗어내려 오는지 모를 천 갈래 만 갈래의 빛의 줄기, 번져가는 연분홍의 영롱한 서광이 신비롭습니다. 깊은 산 특유의 변화무쌍한 날씨로 이파리마다 묻어 내리는 이슬방울로 밤 풍경이 황홀합니다. 환상적인 아름다음이 펼쳐집니다.

   물을 마시러 잠시 나갔더니 ㄱ친구가 단짝과 같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멀리 보였습니다. 달빛은 암자의 늙은 지붕위로 번져가고 나는 이 황홀한 한 순간을 놓칠세라 눈감고 가만히 침묵해 봅니다. 이 순간 나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깊은 산 한밤의 자연 앞에서는 침묵이 그 예의일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 마디 던져 보았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이 한 밤에 혹시 호식(虎食)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고 했더니 그들은 말없이 그냥 웃습니다. 태초의 음향이 메아리쳐 퍼져나갈 듯한 이 밤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갰던 날씨는 다시 흐려져서 붉은 달 기운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마냥 흘러가는 이 한 시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조용히 앉아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ㄱ친구는 번져오는 한밤의 달빛에 그 모습이 무척 외로워보였습니다. 나무 사이로 벋어 내리는 천 가닥의 달빛이 ㄱ의 온몸을 휘감아 흐르는 듯합니다. 어느새 ㄱ친구는 숙소로 들어가고 자취가 없습니다. ㅂ형이 옆에 와 있었습니다. 그와 모처럼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그는 운명, 고뇌 등에 희롱당하고 고통당하는 시편을 많이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암자 안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그 순간 육중한 암자의 자태가 나를 압박하는 듯합니다. 강박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엄습하는 듯도 합니다. 이 밤은 그 자체로써 무한히 신비로운 자연의 용자(容姿)를 울림 있는 코러스로 노래하는 듯합니다.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누워서 잠을 청해봅니다. 홀연히 이 시간, 이런 낯섦에 대한 부적응, 객수(客愁),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계속 밀려듭니다. 게다가 곳곳으로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자꾸 달아납니다.

   다시 밖에 나왔습니다. 돌계단을 디디고 경내 뜰로 내려옵니다. 혼자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엷게 흐린 하늘은 달빛이 번져 뿌옇게 보입니다. 건너편 산비탈에 꽉 들어선 물상(物像)들이 어둠에 묻혀서 서로 짙게 엉겨 붙어 있는 듯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바위의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이 밤에는 난데없이 맹꽁이 울음이 골골이 퍼져나갑니다. 골짜기를 휘감아 내리는 물소리는 원초적인 생명의 기운 같습니다. 숱한 정령들이 자기의 생명력을 뽐내는 듯합니다. 무수한 생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아 도는 듯합니다. 사명스님이 입적하였다는 방은 바로 옆방이라고 하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방은 여자학생들이 묵고 있습니다.

   ‘둥둥, 둥둥’ 하고 바라와 목탁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벌써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새벽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꼬박 이 밤을 새우고야 말았습니다. 먼 훗날 산사에서의 이 밤을 꼭 기억할 것 같습니다.    2022.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