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모처럼 기대에 부풀었던 해인사(海印寺) 행이 오전의 방공대피(防空待避) 훈련으로 열이 좀 식어진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학교버스로 가두(街頭)에 실려 나와서 잠시 동안 계몽요원이 되었습니다. 오전 그 한 시간은 온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습니다. 뭔가 곧 일어날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였습니다.
출발 준비를 해서 오후 1시 20분에 주차장에서 시외버스로 출발하였습니다. 일행은 모두 19명, 남학생 14명, 여학생 5명이었습니다. 나는 창가로 바싹 다가앉아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보리걷이가 다 끝나가고 모내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약간 흐린 날씨였습니다. 나지막한 산들이 안개 같이 부옇게 그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번뇌와 불안 같은 불편한 기분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보리까락을 태우는 연기가 퍼져 차창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흙 내음도 함께 섞여 구수하게 풍겨왔습니다. 농부들의 바쁜 일손, 푸르른 가로의 시원한 모습, 뽀얗게 흐려진 먼 시야, 흰 모래 벌판을 이루고 있는 강안의 검푸른 수목들, 모든 것은 흙내와 더불어 나의 마음을 오래된 먼 추억의 세계로 이끌어갔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팔락이는 머플러 같은 머리카락들, 그리고 창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결……. 이렇듯 여행자의 심경은 언제나 부드럽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먼지 나는 길을 달리기를 몇 시간, 오후 4시쯤 되어서 해인사에 도착했습니다. 차가 가야산의 위세를 이어받은 듯, 울창한 삼림으로 가득 찬 산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울창한 나무들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끝에 간간히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별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기암절벽을 아래로 굽어보며 뱀 같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차는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내려다보면 천인의 아찔한 계곡, 거기에는 태고의 어떤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 아래 유유히 돌고 있는 물레방아 있는 곳이 정녕 인간의 원초적 고향 같았습니다.
차에서 내려 한참 만에 떠올랐던 것은 우연히 같은 차에 탄 ㄷ항의 벗 ㅊ이었습니다. 동반한 여인이 있는 듯 하여 나도 짐짓 모르는 척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을 생략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인연일 것 같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시간에 같은 차를 탔다는 사실, 반가워하는 그의 모습, 그러면서 한편 뭔가 불편해하는 듯한 그의 표정. 그의 애인인 듯한 동행. 이전의 그와 나의 관계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한 그와 나와의 대화였습니다. 모든 것이 언뜻 스쳐가는 인연이라 생각했습니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맞으면서 우리들은 어두운 산골짝을 걸어들어 갔습니다. 여전히 좌우를 꽉 메우고 있는 원시림들, 물소리들뿐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저녁 묵을 곳은 홍제암이란 암자인데 선생님의 안내로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암자치고는 규모가 꽤 컸습니다. 암자 앞에는 깊은 계곡이 있고 옆에는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제 감꽃이 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과 대화를 나누는 종성(宗性) 스님은 여기가 고산지대라 이렇게 개화시기가 늦다고 하더군요. 그 옆에는 산목련도 피어 있었습니다. 작년 운문사에서 보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보니 더욱 청초해 보였습니다. 암자 옆에는 사명스님의 비석과 사리탑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 합천서장이었던 일본인 다께우라가 사명대사의 비문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구절이 있다면서 훼손하고 난 뒤 느닷없이 이질 역병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짐을 풀고 나서 땀에 전 몸을 씻으려고 바로 옆 계곡에 들어갔습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발이 시릴 정도였습니다. 동행한 ㄱ의 모습이 바위 위에서 언뜻 보였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나는 출발하기 전부터 ㄱ도 같이 가야할 텐데 하고 속으로 은근히 바랬습니다. ㄱ은 언제보아도 단아한 모습입니다.
암자에서 먹은 저녁은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메뉴였습니다. 모두들 밥맛이 있다면서 두 그릇이나 먹어치우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방은 불을 지펴서 뜨뜻하여서 아까 계곡에서 돌에 미끄러져 젖은 옷을 금방 말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복숭아뼈를 돌에 들이받아서 아파서 혼이 났었습니다.
초저녁 날씨는 어느덧 개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모두들 계곡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외나무다리는 아찔한 계곡 위를 연결해주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인단애(千仞斷崖)였습니다. 아래에 어슴푸레 보이는 것은 이끼와 물 뿐이었습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짐> 2022.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