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토론
청솔고개
나는 지금까지 전 생애에서 대학 생활, 군 생활, 초임 및 복직 임용을 합친 20대 10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고향에서 줄곧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이어진 이런 저런 모임이 몇 있지만 사전 약속 시일 관계없이 바로 연락을 해서 만만하고 편하게 밥 한 끼 같이 할 친구는 별로 없다.
그래도 중학교 시절을 함께 하였던 고향 친구 하나와 가끔 만나서는 이런 식으로 편하게 식사를 같이하곤 한다. 왠지 이 친구와는 이래도 괜찮다. 전화 갑자기 걸어서 “식사 됐나?”그러면 “됐다.” 하든지, “선약이 있어서”해도 서로 별로 부담이 되거나 미안하지 않다. 그건 그 친구와 동병상련의 어떤 감정이 통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중학교 시절을 같이 했다지만 그 땐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그 후 평생 같이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편한 점을 찾아 낸 것 같다. 그건 이런 닮은 점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고향에 혼자 와서 10년 가까이 구순의 노모를 봉양하는 그의 입장과 5년 전부터 구순의 아버지를 봉양하는 나의 입장이 통한다. 그 외에도 들여다보면 가정사의 내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만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 등에 대해서 희한하게도 서로 대화할 거리가 많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1차 식사하면서, 2차 산책하면서, 3차 찻집에서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을 땐 대 여섯 시간을 넘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념 상이나 이념 상, 서로 죽이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할 때가 있고 우리는 서로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토론의 끈을 조여잡고 당기면서 그 긴장감을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대화의 방식이나 분위기 속에 대번 몰입되고 만다. 대화와 토론을 즐기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이다. 아마 우리가 모든 게 너무 맞아떨어지면 더 재미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때는 일부러 예민하게 서로 다른 부분을 과장해서 톡톡 건드린다. 그 친구도 그걸 안다. 그러면서 그 친구도 그런 방식으로 나에게 대응한다.
그 친구 만나러 나가면서도 당장 오늘은 무슨 이야깃거리로 서로 즐기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슬쩍 사전 준비도 해 본다. 그런 시간이 참 즐겁고 기다려진다.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즐기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비가 와서 산책은 같이 못하다 보니 식당에서 마감할 때까지 이야기하다 나와서 다시 찻집에 가서도 너무 대화에 몰입한 나머지 마무리 정리할 때까지 자리를 지킨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는 서로 적절한 이야깃거리가 머릿속에 충전될 시간을 감안하여 다음 만날 날을 생각한다. 대화와 토론 거리의 충전 기간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누구든 먼저 식사를 청한다. 서로 부지불식간 그런 간격을 확보하면서 약속 일시가 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 토론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토론 학습을 많이 시켰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토론학습도 연구했다. 이를 위해서 실태 파악을 해 보았다. 지역 관내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결과, 토론의 개념과 절차를 모두 일부 인지한다는 응답이 30%정도 나왔다. 절차에 따른 토론(토론 프로그램에 참여 포함)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 응답이 65%정도 나타났다. 다만 학교 토론 수업에 대한 관심과 흥미 도는 40%로 나타나 아주 고무적이었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15년 정도 토론 수업을 학교현장에서 적용해 보았다. 이런 수업 형태는 학생들에게는 수업의 천국, 지도교사에게는 그 천국의 길을 닦아가는 힘든 작업이었다. 허지만 힘들지만 싫지는 않은 길 닦기 작업이었다. 그런 수업시간은 그야말로 준비된 것 이상 활발한 상호작용으로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수업 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버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의 발생은 관련된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기인된다고 본다.
의사 결정의 과정이 바로 토론인 것이다. 전 국민이 토론의 개념, 절차를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구석구석에서 토론 문화가 생겨난다면 비록 그 효율성은 떨어질지언정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인한 갈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제는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많이 절감될 것이다. 사회 지도층, 특히 지식인, 정치인 등은 토론문화를 주창하지만 본인들이 그 이해 당사자가 되면 토론은 실종되고 떼쓰기와 맞고함만 난무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이론적으로도 그들은 토론이 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건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의사결정 방식, 이를 답습하는 기성세대의 행태가 그 주범인 것이다. 성장과정에서나 학교에서 토론을 배울 기회도, 연습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지난 반세기 넘게 우리는 압축성장한다고 절차보다도 효율성만을 따져온 것도 많이 작용한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갈등 해소에 대한 사회적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모든 것은 이런 토론의 끝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경청’의 미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김태균의 「지혜의 숲에서 길을 찾다」중에서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당신은 충고를 시작하지
나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신은 말하지
당신은 내 마음을 짓뭉개지.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나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들어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돼.
그저 내 이야기만 들어주면 돼.
202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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