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민들레와 수선화 /수선화는 달밤에 보아야 더 아름다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솔고개 2020. 4. 16. 00:20

민들레와 수선화

                                                                                                                                                                                                                            청솔고개            

어제 고사리 뜯으러 갔다가 정원수가 자라고 있는 산자락 풀밭에 노란 민들레꽃을 보았다. 그 동그랗고 자그마한 꽃들이 보석처럼 정오의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래 밭둑이 된 언덕에는 가시덤불이 빼곡한데, 그 사이로 수선화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수선화의 흰 머릿결이 봄 햇살에 빛나고 있문득 수선화는  달밤에 보아야 더 아름다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러시아와 북유럽 여행 때 자주 보았던 민들레꽃밭이 떠오른다. 광활한 대지에 점점이 수놓은 듯한 민들레의 샛노랑이 아직도 내겐 강렬한 인상으로 꽂혀 있다.

다음은 그때의 기록.

 엊그제 내렸던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로 꿈에도 그리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의 배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혼잣길이었다면 맘껏 이 거리를 오랫동안 사시사철 다 겪어보았으리라마는 우리 삶에는 늘 동행 있음이 그 속성임을 어찌하리오. , 언제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러 진눈개비 내리는 이 도시의 운하 다리를 질벅이면서 밤새 걸어보며 그 눈먼 소녀를 몽상할까. 그래서 진정한 여행은 혼자길이 되어야 하나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이 순간, 이 거리, 여기 동행하는 친구들만 생각하자. 가장 소중한 세 가지임이라. 지금은 러시아의 봄이다. 여정을 돕는 것 같아서 날씨마저 화창하다. 공항에서 내려 여름궁전 가는 길은 한없이 평화롭고 한가했다. 샛노란 민들레꽃 밭이 너른 들녘을 그대로 수놓고 있었다. 북국의 상징이라는 자작나무 숲도 풍요롭다. 살구인지 매화인지 모를 꽃나무가 화사하게 피어있는 다차(러시아어로 가족과 연인들이 즐기고 체험하는 별장)가 왠지 내게 친근하게 느껴진다. 유채꽃밭도 보인다. 어디로 가는지, 먼 시베리아로 향하는지, 철길도 보인다. 이 모든 게 무척 낯익은 풍경 같다.

  수선화는 달밤에 보아야 아름답다는 것은, 내 20대에 보았던 강렬한 인상의 영화 라이언의 딸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그 화면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소개된 아일랜드의 어느 해변에는 무리지어 자생하고 있는 수선화가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수선화꽃밭을 배경으로 아일랜드 해변 마을의 어린 신부 라이언과 영국군 캠프의 부상당한 전쟁 영웅인 영국군 장교 도리안과의 위험한 사랑이 펼쳐지고 있었다금지된 열정적 사랑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전쟁공포증에 고통당하고 있는 점령군의 장교를 사랑하는 어린 신부에게 다가온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운명이 달빛 아래 선연히 빛나는 수선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40년도 더 지났는데 그 한 장면은 마치 섬광처럼 평생 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나의 20대로 돌아가서 그 영화에 다시 한 번 빠져보고 싶다.                                                                                                                                                              2020.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