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어머니 가시는 길, 그 셋째 날
청솔고개
오늘은 정말 우리 어머니를 땅에 묻는 날이다. 좀 비감해진다. 어제부터 아이가 정말 기특하고 고맙다. 그동안의 할머니 뵙지 못한 것을 사죄하려는 듯 음식 나르는 일부터 다른 심부름 같은 걸 기꺼이 도와준다. 그런 아이가 피곤한 듯 빈소 식당 구석에 잠에 빠져 있다.
새벽에 일어나 상식을 드리고 있는데 ㅎㄷㅎ 친구가 조문 왔다. 마치기를 좀 기다렸다가 조문을 받고 같이 식사를 했다. 모두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이제 오늘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슬슬 철수 준비를 해야 한다. 드디어 영결식(永訣式), 아이가 모신 어머니 영정을 앞세우고 모두들 뒤따라 다시 영안실에 내려가서 의식을 엄수했다. 이 순간을 기록해 두고 싶었지만 그 엄정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삼가는 게 도리라는 생각도 든다. 조용히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은 심경 그 자체다.
12시 좀 지나 맨 앞에 영정을 모신 아이, 아버지가 타신 차는 큰 매제 승용차가 선도하고 다음은 운구차, ㄱㅊ종제 차, 둘째 종숙 차, 내 차가 따른다.
시내를 통과해서 ㅅㅈ동 길가 큰집 앞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본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대성통곡 오열한다. 나도 이 순간만은 울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76년에 ㅎㄴ동 집에서 여기로 이사를 했으니 여기서 40년을 사셨다. 만년에는 거실에서 투병하시면서 그렇게 꽃을 보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어린다. ‘어머니 이제 여기도 마지막입니다. 작년 1월 10일인가 요양병원 가시기 전 잠깐 한 순간 들렀다가 꼭 일 년 만이군요.’ 큰방, 작은방, 사랑방을 거쳐 가는 동안 이이는 울음이 북받쳐 주체치 못한다. ‘아이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은 다 그런 것 아닌가.’ 운구행렬은 일로 하늘마루로 향했다. 하늘가는 길은 참 멀고도 높은 것 같다.
여기서도 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2시 다 되어서 화장 의식에 들어간다. 장제사가 “어머니 집에 불났습니다. 빨리 나오세요!”를 큰상주인 나 보고 세 번 복창하라고 해서 그리 했다. 그 다음 그냥 셔터 같은 게 내리어지면서 드디어 시작되는 거다. ‘우리 엄마 뜨거워서 어찌하나요?’ 하고 마음속으로 소리쳐본다. 그러면서 다시 유족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제상에서 위령제를 봉안했다. 서쪽에 난 창에는 따스한 겨울햇살이 비쳐 들어와 포근하다.
아버지는 어머니 영정에 절을 올리면서 “여보! 당신 만나 66년 같이 잘 살았습니다. 이제 부디 편안하고 행복하고 아픔 없는 곳에 잘 가세요!”하시면서 통곡하신다. 오늘 아버지의 이 고백이 가장 큰 울림이 된 것 같다. 모두들 눈시울을 또 붉힌다. 모두들 한 잔씩 올렸다. 이어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화장 만료 대기시간에 둘째 매제와 참 오랜만에 말을 나누었다. “잘 왔다, 앞으로 잘 해 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해 본다.
드디어 유골을 접견하는 시간이다. 어머니의 작은 몸뚱아리는 몇 개의 하얀 뼛조각으로 화했다. 잠시 후 유골은 다시 더 가는 가루가 되어 작은 나무 상자에 담겨서 내게 건네진다. 이를 넘겨받으면서 100년의 세월 한 평생이 한 두어 시간으로 압축된 것 같다고 내가 주변에게 말했다.
수습하고 나니 오후 4시 40분, 내 차에는 첫째 동생과 아이가 탔다. 아이는 옆에, 동생은 뒤에 타고 출발했다. 고향 마을로 거쳐 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큰 길로 전 속력으로 바로 달려갔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손 호호 불면서 새댁 시절 빨래하던 맞도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거쳐 갈 수 있다는 게 다소 위안이 된다. 그렇다! 어떤 삶이든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어떤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어머니의 삶도 그런 의미의 삶.
벌써 해는 뉘엿뉘엿, 내 마음은 더욱 쓸쓸해진다. 선도 차는 ㅇ동으로 해서 갔다는데 그곳은 아버지 첫 학교 부임지로 같이 어머니 아버지가 첫 살림을 하면서 보내던 곳인데 내가 생각이 짧아 그 곳으로 못 모신 게 못내 아쉽다. 그 외에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모든 게 아쉬움이다. 내 영유아기, 세 살까지인가 그곳에서 자랐다고 이곳을 지나면서 몇 번이나 그 때를 회상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윗못, 아랫못에 빨래도 많이 했고 셋방 살던 집은 점방이었는데 ‘과자를 니가 참 잘 먹었다’고 말씀하셨던가. 그곳을 지나시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니 참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따스한 봄이라도 되거든 어머니 영정 사진이라도 내 가슴에 안고 이곳을 꼭 한 번 꼭 지나면서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다. 이러한 절절한 내 가슴을 누가 알리!
바로 묘소로 올라갔다. 2014년 6월 28일 오후 4시, 재작년 여름 어머니 생신날 여기 한 번 모시고 왔었다. 그 때가 마지막으로 오신 것 같다. 그 때 어머니는 벌써 거동을 거의 하시지 못해 차에 앉아 계시고 아마 당신 묻힐 자리를 생각하고 계시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머님은 벌써 고향 마을도, ㅇㄱ 아재도 몰라보셔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장례 행렬의 묘소 도착이 너무 늦어버려서 묘소 인척 분들에 의해서 고유제(告由祭), 개토제(開土祭)는 이미 마쳐진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유골은 손바닥만 한 오동나무 함에 담긴 채, 한두 뼘 깊이로 잔디 밑의 흙을 파고 묻혔다. 그 시간은 서운할 정도로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어머니는 이제부터 정말 별세(別世), 영면(永眠)과 안식(安息)의 시간을 맞으시는 것이다. 이승에서의 어머니의 마음과 몸의 모든 고통은 여기 한 자도 안 되는 땅에 묻어져 서서히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토제(平土祭)와 산신제(山神祭)가 치러졌다.
이 순간, 내 마음이 오히려 평온해진다. 아버지 어머니의 피와 살에 어머니의 몸을 빌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이처럼 한 줌의 티끌과 먼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다. 포근한 날씨라지만 산에서 해가지니 좀 춥다. 마음이 저물어가는 겨울날처럼 암울해진다.
저 하늘 같은 곳, 멀리서 보면 나의 한 평생도, 그 모든 것도 흙에 묻히는 이 시간만큼 짧고 덧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은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내 심중이 암연(黯然)히 수수(愁愁)롭다.
오늘 상례 절차는 모두 끝났다. 내가 참례한 모두들에게 늦게까지 동행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의 답례로 저녁 식사가 있으니 꼭 잡숫고 가라고 당부했다. 근처 면소재지 한 식당에 좌정하면서 속으로 남은 사람은 이렇게 또 먹어야 하는 게 현실임을 절감했다.
이어서 큰집에서 다시 아버지 모시고 우리 오남매와 그 후손들이 모두 모였다. 이것저것 남은 처리할 일을 대략 의논하고 나니 이제는 이 ‘큰일’이라는 공식 행사가 종료된 듯, 헤어질 시간. 서울로 대구로 황황히 떠났다. 수고들 했다. [2016. 1. 7. 목. 맑음.] 2020.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