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마음, 감정 2
청솔고개
내가 교직에서 들어와서도 유소년 성장시절의 부담감, 책임감으로 그 동안 억눌러져 있던 나의 감정이 세련되지 못하게 표출되는 수가 많았다. 때로는 방관, 침묵 일색으로 때로는 과도한 반응으로 나타나서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 이해, 지도 측면에서의 나의 교직 전문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들기도 했었다.
나의 이러한 극도의 편향성은 늘 나를 힘들게 했다. 신임 교직 생활 출발해서 10여 년 동안 아이들 지도하는 데도 나의 이러한 미숙성 때문에 많이 좌절한 것 같다. 그러다가 늘 남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남녀 공학 병설 중고등학교로 전근이 되어 여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왔다. 시골 여학생들의 순진무구함에 비춰볼 때 그동안 학생지도에서 나의 거친 감정과 언어의 표출 방식에 대해서는 교사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이 천사나 아기 같이 느껴졌다. 천사나 아이한테 막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내가 행한 것은 일단 나 자신의 언어의 순화였다. 일단 아이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대어를 쓰기로 했다. 물론 그때도 교사의 교육활동에서 공식적 기본언어는 존대어로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이런 대화 방식의 전환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간혹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아이들의 불성실한 수업 태도 등 어떤 이유로든지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대한 1차 대응 방식은 존댓말에서 말을 놓는 것으로의 전환이었다. 일단 존댓말을 쓰니 내 목소리와 어투도 조용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이는 자칫하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교사 언어의 폭력성, 파괴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완충 장치가 하나 마련된 셈이었다.
우리말은 세계 언어 중 가장 복잡한 존비법(尊卑法) 체계로 돼 있다. 청자높임법에는 ‘하십시오체, 해요체, 하오체, 하게체, 해라체, 해체’ 등이 혼용되고 있다. 듣는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에 따라 높임법이 현란하게 혹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중세국어에서는 이 존비법이 더 엄격히 적용되고 있음은 당시 자료를 통하여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높임과 낮춤에 대한 격식과 예절에 민감해 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존댓말은 그야말로 말 듣는 사람을 존중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청자의 존재감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쓰는 말로는 ‘해요체’ 정도를 주로 썼는데 뭔가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져서 기다려보다가 개선이 안 될 조짐이 보이면 ‘해라체’ 혹은 ‘해체’로 바뀌면서 나의 수업 진행 의지의 단호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라체’ 혹은 ‘해체’의 단호한 어조, 강조의 어조로도 분위기 개선이 안 되면 그 다음은 목소리를 낮게 깔거나 표정을 더욱 단호히 하여 나의 의지를 더욱 확인시키는 단계로 진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에 1단계 ‘해요체’가 없고 바로 ‘해체’였더라면 그만큼 서로 간 기다리거나 탐색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나중에는 더욱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과거에는 내가 이런 방식의 지도와 훈육을 교실에서 했던 게 참 부끄럽기도 하였다.
언어의 폭력성이 감정이나 행위의 폭력성의 대체재(代替財)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조장한다. 부정적인 시너지작용을 한다. 언어의 폭력성은 감정과 행동의 폭력성을 불러온다. 언어 철학에서의 다음 명제는 이런 의미에서 이제야 충분히 공감이 된다. ‘감정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감정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2021.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