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마음, 감정 1
청솔고개
나는 이 나이에도 느닷없이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더러 있어서 스스로도 참 곤혹(困惑)스럽다. 대체로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인격이 원만해져서 마음과 욕심을 내려놓게 되어서 완전한 인격체로 된다는 것이다. 산에 있는 돌은 모가 많이 나고 날카로워서 잘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굴러 내리면서 자꾸 부대끼고 닳으면서 바닷가까지 옮겨져서 매끈한 조약돌이 되면 원만해지는 것이다. 흔히 이런 비유를 많이 든다. 그렇다면 이 나이의 나는 지금은 조약돌이 돼 있어야 하는가.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이제는 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심리 상담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나?”라고 주변에서 갑자기 힐난이라도 하면 나도 적절히 대응할 만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가족들이 나보고 이른바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상담사(相談士)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과도한 분노표출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박하면 더욱 참을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궁색하게 흔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을 들먹이곤 한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내담자에게는 감정표현에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것으로 보아 분노의 감정도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평소 자기감정을 너무 숨기고 점잖고 좋은 사람인 척 하다가 결국 더 큰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어쨌든 자기감정 표출연습을 해야 개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감정 처리에 대한 방식에 대해서는 나의 후천적 성장 및 생활환경과 관련지어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5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내 어릴 때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넷 등 4대에 걸친 복잡한 가족 구성과 조직 속에서 성장해 왔다. 나는 성장하면서 맏이 혹은 몇 대 장손에 대한 기대감, 대접 같은 것이 결국 정신적 압박과 부담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그래서 싫은 것이 있어도 나는 참아야 되고, 좋은 것은 양보해야 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나름대로 정신적인 압박을 말없이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나의 유소년 시절은 정말 고독하고 외로웠던 것이다. 장손인 나는 매사에 잘해야 되고, 강해야 된다는 강박(强拍)이 나에게 끊임없이 작용했을 것이다. 평생을 괴롭히던 나의 과도한 정신적 불안정성도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이 된다. 내가 만약 성장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불평불만을 표출하고,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는 까탈스럽게 보이콧하는 등 나의 주장과 감정을 충실히 드러냈더라면 지금쯤 나는 훨씬 마음 편하게 평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착하고 무던한 ‘아들, 장손, 아들, 큰형님, 큰오빠, 교사, 직장인, 생활인, 남편, 아버지’로 남으려다 보니 너무나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 첫 증좌는 대학 입학했을 때 드러났다. 같은 학과 학우들 사이와 대화하는 데 있어서 나는 너무나 서투르고, 부자연스러움을 실감했다. 대화의 서투름은 결국 감정 처리의 서투름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정말 너무나 활달하고 능숙하게 대화와 관계를 맺고 감정 표출도 잘 하는데 나는 그런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그냥 부러운 듯이 바라볼 뿐, 심한 고민과 좌절에 빠질 때가 많았다. 특히 여학생들과의 대화에는 더욱더 자신감이 없었다. 그들과 어쩌다 시선을 교환하다 보면 그것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몇몇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끼어서 내 목소리를 내 보자고 뭐라고 한 마디 해도 자신감이 없어보여서, 아니면 내용이 주목 못 받아서 그런지 그냥 무시될 때도 많았다. 그냥 “패스”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더욱 자신감이 상실되는 것만 체감할 뿐이었다. 요즘말로 그냥 ‘씹히’는 것이다. 나의 존재감은 바닥을 친다. 그러다가 가끔가다가 한 순간이라도 나의 대화에 주목해 주는 상대가 나타나 주면 정말 고맙기 짝이 없었다. 대상과 대인에 대한 나의 이러한 관계와 대화에 대한 미숙성을 절감한 후 평생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보았다. 예를 들어, 대학 시절에는 말로보다는 몸을 써서 직접 뛰는 서클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아 본다든지, 말로는 부족함이 많으니 글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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