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겨울 강, 바다, 숲/봄이 오면 나는 거송이나 왕대는 아니더라도 가파른 인생 고개를 지키는 자그마한 푸른빛을 잃지 않는 잔솔이나 순어리대라도 되고 싶다

청솔고개 2021. 1. 4. 04:32

겨울 강, 바다, 숲

                                                                            청솔고개

   겨울에는 어디로 가나 황량한 느낌만이 남아 있다.

   특히 메마른 겨울 강은 더하다. 그 강 옆에는 마른 갈대나 억새가 겨울바람에 서걱거린다. 그 사이로 엷은 햇살을 받고 푸득거리는 겨울새도 추워 보인다. 저리도 작은 멧새나 참새는 이 세찬 겨울바람을 어떻게 견디어 나가지 하고 불쌍해진다. 어쩌다 가뜩이나 얕아진 강이 한파에 얼어붙어버리면 평소에 심상하게 지나쳐보던 물새들, 오리 떼나 원앙이가 제일 먼저 안 보인다. 그래도 얼음장의 숨구멍 같은 데는 아직 얼지 않아 오리 몇 마리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면 반갑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이 겨울새들은 다들 어디로 피난 갔지. 그새 부동의 강을 찾아 더 따스한 남쪽 멀리 떠나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강변 마른 나뭇가지에 모여서 재잘거리는 새소리는 때로는 잠들어 있는 내 정신과 영혼을 들쑤시는 듯한 성가심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그런 개입이 조금씩 낯설어진다.

   20대 나의 청춘 시절에는 왠지 이런 겨울이 더 좋았다. 겨울 자가 들어가면 다 좋았다. 아마 문학이나 영화, 음악에 빠져든 내가 동일시 방어기제를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겨울바다, 겨울바다의 얼어붙은 파도. 그 너머 등대, 그 등대의 등대지기……. 모닥불 등은 그런 장면에서 아주 낭만적으로 그려져서 그런가도 싶다.

   특히 겨울이면 내리는 눈에 얽힌 감상(感傷)은 너무 심해서 아주 병적이기까지 한 것 같다. 폭설이 내리면 대나무가 비스듬히 휘어진다. 이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 풍광은 허연 눈을 덮어쓴 대나무 숲의 그 투명한 연두색이 연출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눈에 덮여 더욱 부드러워진 연두색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한동안 그런 연두색 머플러를 겨울만 되면 나의 20대 후반 내내 두르곤 했었다. 그런 풍광을 찾아가며 카메라에 담아서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혼자 70센티미터도 더 내린 눈길을 푹푹 빠지면서 산행하면서도 전혀 힘들거나 추위를 느끼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그해 겨울에는 유독 많은 소나무가지가 눈 무게를 못 이겨 축 쳐져서 견디다 못해 찌익 하면서 가지가 째지는 아픔을 목도했다. 어떤 한 아주머니는 이를 보더니 지나치는 나를 보고 “도대체 시청 공무원들은 다들 뭣 하느냐? 이럴 때 모두 나와서 저 위에 눈을 치워줘야 하지 않는가? 이러다가 소나무 다 찢어지겠다.”고 마치 내가 시청공무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해서 소리치는 걸 보고 내가 어이없어서 “그러게요. 허허”하고 맞장구치면서 넘긴 일이 떠오른다. 그 후 그 소나무 숲의 3분의 1은 저절로 가지치기가 돼서 하늘이 훤히 넓어져 보였던 게 생각난다. 그 솔숲에서는 내게 한 번씩 메아리처럼 들려왔던 “우우”하면서 울부짖던 솔바람은 소리가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도 잇다.

   나의 20대에서 40대까지 생애의 전환기에 나를 이끌고 간 많은 굵직한 역사들이 주로 겨울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극적이고 긍정적인 각인 효과로 작용한 것 같다. 물론 긴긴 겨울의 어둠과 침묵은 나로 하여금 깊은 우울과 심한 불면의 계절로 몰고 가긴 했지만 또한 겨울의 시작에서 만난 인연과 그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처음 본 지 60일도 안 돼서 혼인 진행이라는 인생 사건을 치른 것도 일조한 것 같다. 그래서 신혼여행지도 겨울바다를 택했고 운명의 첫 아이 배태 소식 들은 것도 겨울 끝자락이었으니까.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나는 대숲에 불어드는 겨울바람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 바람을 나는 천년의 댓바람이라고 이름 하였다. 댓잎과 대나무 가지와 굵은 줄기 사이로 불어드는 바람은 그 미세한 틈새로 공명돼 “쏴아…….” 하고 천상의 신비한 화음을 자아낸다. 마치 금강경(金剛經) 개경게(開經偈) 초입의 ‘無上甚深微妙法’의 소리 같다는 생각을 늘 해 왔다. 댓바람은 그래서 법음(法音)이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은 내게 너무나 잔인한 계절이다. 우선 체중을 줄이고부터는 손발 끝이 차가워져, 스키용 방한 장갑을 껴도 손이 심하게 시리고 나중 되면 마비되고 통증도 심해진다. 얼마 전 영하 5도 정도 날씨에 산행에서는 아이가 건네 준 핫팩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신문물은 말로는 들어보긴 하였지만 저온화상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서 어째 좀 미심쩍었는데 사용해보니 최고의 발명품임을 확인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꼭 껴야하는데 또 호흡기 보전하기 위해 마스크나 목도리로 입을 가리면 입김이 안경에 서리어 무척 불편하다. 때로는 그 뿌연 서리 낌이 마치 미구의 나의 노년 청사진을 보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우울하다. 나의 미래는 청사진이 아니라 오리무중의 회색 사진, 뿌연 안개 사진이다.

   겨울 숲도 청년 시절에는 나목이니 설목이니 하면서 잔뜩 내게는 감성의 초점이었었는데 이제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한, 방풍의 유용한 기능이 더 와 닿는다. 내가 자주 가는 낙우송 숲속에 들면 아무리 강풍경보가 내려도 그곳은 무풍지대다. 이름 그대로 어린아이 숨소리 같은 미풍에도 새의 깃털 같은 그 나무의 잎들이 시나브로 다 져서 그 드러난 뿌리를 덮어주기 때문인가 보다. 그 무풍지대에 들면 아무소리도 없다. 그냥 침묵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한 식경 만 있으면 그 깃털이 지는 소리가 감지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명상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부터는 나도 생물학적으로 생애의 겨울 주기에 접어 든다.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나는 거송이나 왕대는 아니더라도 가파른 인생 고개를 지키는 자그마한 푸른빛을 잃지 않는 잔솔이나 순어리대라도 되고 싶다.    2021.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