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3월의 스키 장 3/ 이제 몸에 힘을 빼고 잘 넘어지고 가볍게 일어나면서 용기 내서 A자(字)에서 11자로 각도를 좁히는 기술을 숙달하면서부터

청솔고개 2021. 3. 10. 23:52

3월의 스키 장 3

                                                                                               청솔고개

   다음 날 날이 밝았다. 오전에 다시 그 초급자 코스로 올라가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엊저녁에 내가 무슨 용기로, 어떻게 이 절벽 같은 곳을 미끄러져 내려왔을까 싶었다. 스스로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밝은 날 위에서 내려다보니 저 아래 사람들은 아득하게 보이고 바로 밑은 낭떠러지다. 굴러 떨어지면 그냥 골로 갈 것만 같았다.

   이 순간, 퍼뜩 연암(燕巖)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가 생각났다. 연암이 중국 백하(白河)를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널 때는 밤이라서 마치 물지킴이와 하수귀신이 다투는 듯 한 끔직한 강물 소리에만 온통 신경이 곤두섰는데 이제 낮이 되어 다시 건너려니 탕탕히 흘러가는 강물이 너무 무서워 고개를 쳐들고 물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연암은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 걱정을 이기 못하는 것이다.” 연암은 밤에는 밤대로 그 도도한 물소리에, 낮에는 낮대로 강물 건너는 게 두려웠다는데 나는 내 눈이 너무 밝아서 그런지 낮이 몇 배나 더 두려웠다.

   나는 엊저녁에 무주리조트 초급자 코스를 영혼 이탈의 상태에서 굴러 내려왔다. 내가 30분이나 걸쳐 좌충우돌하면서 굴러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은 연암의 이치로 보아서는 그 어둠의 덕이었단 말인가. 아마 덕유산 산록을 울리는 로맨틱무드의 음악은 성난 강물 소리였을 테고.

   그날, 나는 일행 중 한 동료가 결국 스키를 둘러메고 가장자리 계단으로 저벅저벅 걸어서 내려가는 것을 목도했다.  "포기, 도중 하차!"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것이다. 스키를 배우다가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걸 몇 차례 경고(警告)의 소리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장본인이 나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스키 연습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내가 왼쪽 방향 턴을 넘어지지 않고 성공한 것은 그해 겨울 세 번째로 스키장에 들르고부터서였다. 이제 나도 비로소 아주 느리지만 넘어지지 않고 지그재그로 활강할 수 있었다. 비록 아주 부자연스러운 A자(字)로 스키 뒤끝을 모으면서 미리 넘어질 것을 대비해서 너무나 조심스레 행보하는 초보이긴 하지만 그 때의 성취감은 잊을 수 없었다. 이제 몸에 힘을 빼고 잘 넘어지고 가볍게 일어나면서 용기 내서 A자(字)에서 11자로 각도를 좁히는 기술을 숙달하면서부터, 여기에서 스피드만 더하면 스키를 즐기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기대감에 나는 흥분했다.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의 스키장에서의 밤과 낮의 대응 방식 차이 등을 비롯한 모든 과정을 통해 연암의 이 화두를 좀 이해할 것 같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나는 이제 도(道)를 알았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이목(耳目)이 누(累)가 되지 않고, 이목(耳目)만 믿는 자는 보고 들은 것이 너무 밝아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큰 강물을 건너면서는 누구나 겁먹는다. 그것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에만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강물도, 인생의 슬로프도 그렇게 건너면 되는 것이다.   2021.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