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진정한 소유 1/ 양철기와로 덮여진 2층의 들창을 통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산, 들, 무덤, 길, 연못, 논, 밭, 골목이 주는 느낌

청솔고개 2021. 3. 13. 22:50

진정한 소유 1

                                                                  청솔고개

 

   오랜만에 큰집을 들렀다. 그새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다고 마당에서 빈집을 지키고 있던 키가 큰 동백나무가 꽃을 한 송이 피웠다. 나머지 대여섯은 눈망울을 살짝 틔우고 있었다. 이번 겨울 동안 적막강산 같은 우리 집을 지킨다고 참 애썼다. 꽃 이마라도 쓰다듬어주고 싶다. 그 옆에는 조로증이 들었는지 처음부터 늘어져 옆으로 퍼져서 캐내 버리려다가 아버지가 끈으로 이리저리 달아매놓은 잎이 아주 기다란 소나무도 잘 버티고 있다. 애기 동백도 나도 질세라 하나둘씩 빼꼼히 실눈을 뜨고 있다. 여기도 봄볕이 벌써 달다.

   나는 몇 년 전 이곳의 지진으로 몇 군데 벽의 틈이 벌어졌다면서 당국에 신고까지 한 이후로 생각했던 집수리가 나의 인생 과제로 대두하는 것 같다. 머리가 좀 복잡해진다. 수리도 수리지만 멀리는 더 큰 문제는 고조, 증조부 때인 100년부터 지녀 오던 것에서부터 가까이는 2,3년까지 우리 집안의 역사가 담긴 여러 자료, 살림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근 30년 전에 당시 벌써 족히 20년은 넘은 다섯 칸 정도 자그마한 한옥 슬래브 집의 외연 건평을 넓힌다면서 하루 만에 단행된 전격적인 증축에 따른 문제도 만만찮다. 그 후 다시 지금부터 8년 전에 토기와 지붕이 낡아서 비새는 걸 막는다고 옥상에 양철기와로 한쪽 경사면을 덧씌운 공사까지 한 형국이라 더 복잡하다. 그때 며칠 만에 큰집을 찾았는데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황당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니 검은 양철로 된 기와지붕이 마치 머리에 맞지 않은 탕건(宕巾)처럼 씌어져 있는 게 정말 코믹했었는데 그것도 오래되니 눈에 익어 심상해졌다.

   그런데 이게 또 효자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우리가 30년 넘도록 살다가 이사하면서 꼭 보관해야 할 물품이나 자료를 느닷없이 생긴 이 공간에 옮기게 돼서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그때 대부분은 처리했지만 그래도 차마 못 버린 자료를 여기로 옮겨 놓으니 이런 적시안타가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해결 과제로 남은 자료의 처리가 다시 인생과제로 대두되게 되는 셈이다. 앞으로 이 자료들의 보관과 처리 문제로 많이 고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극히 일부 자료만 엄선해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해서 보존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린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그게 얼마나 지켜질는지 나도 모를 것 같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일단 우리 선산 묘원 근처에 자료 이관 컨테이너를 둘 장소를 물색해 보기도 했다. 이런 집착 심리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다른 집들이 이사도 쉽게 하고, 거기에 따른 정리도 미련 없이 잘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마인드가 부럽기까지 하다.

   먼저 옮기든 버리든 처리할 자료의 구분이 먼저다. 이를 위해 그 동안 준비한 빈 종이박스를 가지고 2층에 올라가 보았다. 볼 때마다 어지럽다. 처음 이곳에 자료를 옮길 때는 종이박스에 포장해서 나중 처리의 편의를 위해 겉에 처리 기준 등급을 세워보았다. 폐휴지 처리 급, 일단 보전 급, 영구 보전 급 등, 등급별로 표시해 놓았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중고상에 판매, 교환, 기증 등급도 더 보태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은 내가 거의 1년 동안의 기간을 통해 내 나름대로 정리한다고 해 놓은 것을 아버지께서 다시 정리하신다고 다 풀어헤치고 끄집어내서 지붕 너머 우선 안 보이는 데로 옮겨버린 결과다. 지금도 그 자료들이 조각조각 폐휴지처럼 산지사방으로 널브러져 있다. 아버지는 새로 생긴 2층을 공간을 내심 당신만의 호젓한 휴식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원치 않았던 종이박스가 꽉 차게 쌓아져 있으니 너무 복잡하고 시야가 가려져서 답답하다고 나보고 자주 좀 치워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차일피일 미루고 그냥 두었더니 결국 당신께서 그렇게 집행하신 것이다. 그 동안 보관한다고 했지만 거의 방치해 놓다시피 한 것이어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삭는 냄새로 벌써 코가 매캐하고 눈이 따가운 것 같다.

   2층에 올라와서 들창 너머 보이는 풍광은 종일 바라만 봐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고 깊이가 있어보였다. 멀리는 산야 풍광 앞으로는 탁 트인 들녘과 고분들, 가까이 주변 거리나 골목에는 높아야 2층 정도의 한옥 밀집 풍광이 이어져 아주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요즘 트렌드인 골목 투어의 기분을 자아내기는 충분한 것 같다. 나는 가끔 여기 양철기와로 덮여진 2층의 들창을 통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산, 들, 무덤, 길, 연못, 논, 밭, 골목이 주는 느낌이 참 소중하다고 늘 생각했다.

   이런 곳이라면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는 그 상념과 영감을 잘 살린다면 멋진 작품 탄생을 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개인적 작업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공유를 통해 멋진 찻집이나 소박한 숙박시설로 활용이 돼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건 순전히 나의 잣대로 재단한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공간의 재생을 위해 백일몽이라도 꾸고 싶다.    2021.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