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과 여행
청솔고개
새벽 2시까지 아버지의 섬망(譫妄)상태가 악화돼 고함도 치고 욕설도 지르신다. 마침, 옆 병상 한 군데 밖에 없어서 다행이다. 틈날 때마다 토닥토닥 두드려드리고 쓸어드렸더니 좀 조용해지더니 곤히 주무시는 듯 하다가 좀 있으니 느닷없이 ‘내가 알라가’하고 고함지른다. 약간 우습다. 그러면서도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이리해서 나를 재웠을 거라 생각하니 울컥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이 멘다.
저녁 식사는 동항 골목 안에 자리한 맛집, ‘**해녀촌식당’이다. 아이가 미리 찾아 놓은 집이다. 벽면 모두 빼곡히 왔다간 사람들의 필적이 이 식당의 연륜을 말해주는 것 같다. 주인내외도 참 친절하시다. 우리 삼대가 같이 온 걸 좋게 본 듯하다. 그간 아이가 깊이 생각해 놓은 수고로 성게 비빔밥, 멍게, 해삼, 전복 모둠회 등 별미, 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나도 성게비빔밥은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았다. 그 맛이 묘하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식사하고 나니 날이 제법 깜깜해 진다. 해안과 항구에도 등불이 막 켜진다. 숙소에 갈 시간이 너무 일러 다시 섬 일주를 했다. 밤이 되니 여기 바다는 그냥 암흑에 묻혀버린다. 낮에 근처 마트에서 아이와 같이 준비해 놓은 신라면을 끓여서 소주, 청하, 맥주 한 잔씩 나누면서 여행 이튿날 밤이자 마지막 밤 여정을 자축했다. 이번 여정에서 여태까지 아버지가 생각보다 건재하시니 가장 큰 행복이다.
동행과 여행의 공통점은 모두 함께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아버지와 병상 동행을 15일째 하고 있다. 이것도 함께 하는 것인데 여행과는 그 기분이나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여행은 건강, 시간, 금전적 여유 등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한 것으로 인식돼 있다. 그래서 뭔가 멋있고 낭만적이며 극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내재돼 있다.
물론 홀로 여행이라는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구도 여행, 힐링 여행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동행이 필요 없다. 여기서 굳이 동행을 찾는다면 자신의 그림자나 영혼과 동행한다고 할까. 가장 극적인 사례가 예수의 광야 방랑이나 석가의 설산 고행 같은 것이리라.
나의 경우, 지난 날 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자, 즉 나의 아들과 삼대 여행이 있었다. 여기서는 이른바 효도여행 같은 요소가 있어서 나름대로 극적인 동행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구채구 여행, 아버지의 한국전쟁 참전 루트 답사 호국 기행, 작년의 지리산 빨치산 루트 답사 여행, 통영 욕지도 풍광과 맛기행 등은 삼대 동행 여행이다. 혹 이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다른 여행객들은 우리들을 보고 요즘 아주 보기 드문 좋아보이는 여행이라고 덕담을 주곤 했다. 나도 이 여행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보름째 아버지와의 병상 동행은 좀 특별한 여행이다.
처음 한 열흘 동안은 환자는 이 증상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아주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겪는다. 이 증상이 점차 약화, 해소되면서부터는 아버지의 현실 감각과 인식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점차 당신의 존재의 실체를 의식하게 된다. 환자의 인식에서는 당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자식으로서, 간병인으로서 이 모든 것을 보조침상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곁에서 목격했다.
이 전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 부자간의 정신과 감정의 소통과 교감 채널이 점검되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떤 채널은 거의 잡음으로 거의 소통과 식별이 힘들었던 것도 있었다. 물론 재점검하니 말끔히 소통된 것도 있었다.
우리 부자간에서 이보다 더 의미를 깊이 찾을 수 있는 여행이 있을까. 동행이 있을까. 아버지와의 이번 병상 동행 여행이 언제쯤 끝날지는 모르지만 부담과 짜증, 절망과 힘겨움 같은 간병인 생활이 특별한 동행 여행으로 바뀌는 것은 대상[팩트]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건 환자에게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잘못된 신념 혹은 고정관념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바꿈으로써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비로소 불행을 행복으로 인식 전환하여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인지행동의 상담치료 기법이 이러한 소중한 동행 활동에서 접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아주 특별한 동행 여행을 이어갈 것이다.
2020.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