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록 2
청솔고개
꼭 1년 전 오늘은, 우리 집 삼대(三代) 여행의 마지막 날.
70년 전, 1950년 늦가을, 마산 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친 아버지가 소속된 국군 5사단은 지리산 중산리 교동마을까지 걸어와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아버지의 그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루트를 더듬으려고 떠난 여행이다. 오늘이 그 여행길의 셋째 날로, 첫날은 산청군 교동 마을로 추정되는 중산리 골짜기에서 일박하고 그 다음 날 통영 욕지도 들어가서 이박 째 묵고, 통영으로 나와서 우중에 케이블카도 타보고 귀향한 것이다.
다음은 그 날의 기록이다.
(전략) 88고속도로는 신록으로 한층 푸르러져 간다. 여기 전북 지역을 거쳐서 인월나들목으로 빠져나왔다. 아버지는 신록의 산야를 보시고는 연신 감탄사를 내 뱉으신다. 이런 건 정말 나와 똑 같은 자연주의 인생관 소유자이다. 빗방울이 약간 듣는다. 신록 사이로 산 벚이 더욱 돋보인다.
정말이지, 이즈음 산과 들의 샛노란, 연두색, 청록색 모자이크, 파스텔화는 여행객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지리산 자락 남원시 소재 뱀사골 지나,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소재 ‘지리산지구전적비’는 우중에 외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낡고 허물어져 대대적인 보수 공사 중이었다. 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대한 설명이 희미해져 가는 안내 표지판에 새겨져 있다. 70년도 더 된 아득한 세월을 더듬어 이 작전 참가에 대한 아버지의 아렴풋한 기억과 당신 손자의 즉흥 검색 자료 제공으로 대략의 그림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그 앞에서 조용히 서 보신다. 내가 그런 모습을 폰에 담아 본다. 5사단은 공비토벌을 위해서 급조된 부대. 그 중의 한 연대에 아버지가 배속되어서 마산에서 여기까지 몇날 며칠 동안 걸어왔다고 회상하신다.
옆의 수양버들의 연두색과 지천으로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은 우중 산록의 외로움 때문에 더욱 애틋해 보인다. 깊은 산중 날씨도 잔뜩 흐리고 비마저 흩뿌리니 나그네의 암울한 마음은 더욱 깊어간다. 당신의 손자가 중산리 가는 길을 검색한 대로 지리산 자락으로 휘휘 돌아서, 어느 산마루에 올라서 잠시 쉬는데 썩어 빠진 버스를 개조한 가게에는 주인도 없고 비바람만 흩뿌린다. 볼일을 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 고갯마루 위치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다. 인적도 차 통행도 거의 없는 봄비 내리는 길을 달려서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더덕구이, 흑돼지 두루치기, 산채 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하고 나니, 그냥 피로가 스르르 밀려온다.
드디어 아버지가 찾으시던 산청군 교동이라고 기억하고 있던 지점,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을 찾았다. 바로 근처였다. 아버지도 7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시면서 산세나 지형으로 보아 많이 변했겠지만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런 기억에 대해서 무조건 지지해 드렸다. 정확한 지점이 아니면 어떠랴. 아버지에게는 산청군 교동이라는 그 오랜 기억의 지점만이 의미 있는 것 아닌가. 여기 전시관 옥외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손잡고 있는 의미심장한 부조물을 비롯해서, 당시의 체계적인 전황 설명에 대한 자료 전시가 아주 잘 돼 있었다. 아버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깊은 회한과 감회에 젖으신다. 아버지 만면의 주름과 한숨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 근처 숙소부터 들어갔다. 비가 제법 세게 내린다. 통나무 펜션은 아주 특이한 게 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신다. 비는 더 세게 내린다. 아무래도 우중 날씨와 피로 누적으로 오늘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중략) 자기 전 창문으로 내다보니 축축이 젖은 산록에 밤안개가 아득하다. 여기가 지리산 중산리 계곡. 오래 전 아내와 같이 이 근처 어디서 하룻밤 묵으면서 중산리,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을 다녀왔던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오늘, 첫날밤, 푹 잤다.[2019.4.23. 흐리다가 비 옴.]
그런데 아버지는 4일 전, 심한 설사라는 촉발 요인으로 온 전신 쇠약 증세로 급히 입원하신 것이다.
그 동안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 간병에 24시간 매달리니, 꽃이 지는지 봄이 가는지 모르겠다……. 섬망 증상으로 환자가 정신없이 콧줄이고 수액 주사의 관을 마구 잡아뗀다고 해서 팔다리를 고정해 놓은 지 30여 시간이 지난다. 아버지는 답답해서 밤새도록 간헐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발버둥도 치신다.
만산녹엽이 나날이 짙어 가니, 속으로 들어가서 연두, 진초록에 몸과 마음을 담가서 한껏 씻고 헹구어야 하는데……. 지금은 가끔 멀리서 그냥 병실 창문으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우리들이 자신들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유지됨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다시금 절감하겠다. 2020.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