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2012. 4. 24. 화. 맑음
마음이 많이 무겁다. '기분 다스리기' 책을 읽으면서 좀 마음을 조절해 본다. 하루 종일 힘이 많이 들었다. 오전에 동생 병원 진료 때문에 급히 나왔다. 내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딱한 노릇이다. 나는 이렇게 내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본다. 약속시간 11시 30분까지 가야하는데 예기지 못한 일정 변화로 5분 정도 늦어버렸다. 걱정을 좀 했다. 그런데 동생은 벌써 진료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견하고 반가웠다. 농막 지나서 면소재지에 가서 오늘은 은행 거래에 대해서 좀 알려주려고 작정하고 현금 카드도 새롭게 발급 신청해 주었다. 동생이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은 가르쳐주어야 할 것 아닌가. 농막 안이 너무 더웠다. 여름에 여길 나는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오후 늦게 바로 농막에 나갈 준비를 하였다. 농막에 가서 동생을 돌봐 주어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 같았다. 시내 시장에 가서 단호박 10포기 5천원, 오이 3포기 1천 5백 원, 가지 3포기 1천5백 원, 케일 3포기 1천원, 치커리 3포기 1천원, 땅콩 반판 5천원, 쑥갓 씨앗 한 봉지 1천원, 옥수수 10포기 2천원 모두 1만 8천원어치 사서 심었다. 함께 이렇게 심으니 동생의 표정에 생기가 더 도는 것 같아서 좋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의 흙을 뭉개 주고 모종 옮겨 심고 씨앗을 뿌렸다. 물도 듬뿍 주었다. 동생도 참 열심이다. 나도 이 일을 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진 게 정말 기분마저 확 전환되는 느낌이어서 참 좋다. 그래 어쨌든 이렇게 형제가 의좋게 지내는 모습 그 자체는 정말 아름답지 않는가. 행복이 아닌가. 오후 7시 30분 정도 되어서 어두워서야 마치고 큰집에 들려서 어른들 뵙고 그 동안 농막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드렸다. 두 분이 모두 내게 참 동생 돌보아 주는데 고마워하신다. 이 또한 나의 존재의 이유 아닌가. 두 분 모두 건강은 여전하셨다. 저녁 한 술 먹고 돌아오니 밤 9시가 훨씬 지났다.
2012. 4. 27. 금. 맑음
오후에 시장 난젼에서 단호박 모종 13포기 6,500원, 청치커리, 적치커리 씨앗 2,000원, 가지 모종 3포기 1,500원 모두 1만원어치 구입했다. 큰집에서 된장, 쌀도 같이 가지고 농막으로 갔다. 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심어 놓은 데에서는 신기하고 놀랍게도 싹이 많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보랏빛 구름떼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자운영(紫雲英), 이름마저도 고결한 듯, 꽃들이 무리지어 논둑에 피어 있었다. 아름답고 고운 얼굴, 너를 그냥 보낼 수야 없지. 사진도 찍고 떨어져 나온 포기는 캐 담았다. 어둠 속에서도 플래시 불빛에 더욱 찬연히 타오르는 꽃불 같은 자줏빛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꽃의 부리, ‘紫․雲․英’.
오늘 일 마치고 식당에 가서 동생과 같이 저녁 식사 하면서 오리불고기로 모처럼 형제간에 오붓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빨이 많이 없어진 동생이 용을 쓰면서 고깃점을 씹는 모습이 무척 안 돼 보였다. 그래도 이나마 얼마나 많은 발전인가. 후일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는 농막에 티브이와 휴대폰, 냉장고, 가스레인지, 화장실 관리, 각종 수리할 곳 등을 차례로 해결해 나가면 될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걸음으로 큰집에 들러서 아까 시장에서 구입한 수국과 함께 드렸더니 참 좋아하신다. 동생을 돌보다 보니 나에게도 명분이 생겨서 자연스레 큰집에 자주 들르게 되고 부모님도 자주 뵙게 되어서 참 좋다.
2012. 4. 29. 일. 흐림
예정대로 9시까지 농막에 나갔다. 고추모종이 준비 되지 않아서 ㅈㅂ아재 말대로 땅콩과 가지를 좀 성기게 옮겨 심고 옆 땅을 좀 일구다 보니 하루해가 가버렸다. 상추, 시금치에 거름을 좀 주고 주변 청소도 좀 하였다. 모처럼 동생과 같이 농막에서 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좀 신 듯 한 김치에 참치 통조림을 얹어서 쌈 싸먹으니 먹을 만했다. 특별한 말이 없이도 형제가 이렇게 같이 시간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와 치유가 되리라.
삽질 한 번에 들꽃 한 번 보고 곡굉이질 한 번에 소뜨방산마루 바라본다. 호미질 한 번에 고개 들어 허리 한 번 펴고 남산 위 구름 한 번 쳐다보고 구름처럼 일어나는 망념 한 번 떠올려 보고 그렇게 사는 거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밟히는 안타까운 생각들을 이제는 사랑하여야 하리라. 내치지는 말아야 하리라. 내 10대, 20대, 30대에도 줄곧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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