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버림과 지님, 기록과 기억 3

청솔고개 2023. 1. 5. 00:08

                                                                                                                                             청솔고개

   최근 나는 자주 나의 얼굴, 특히 눈매와 머리칼, 목소리와 표정, 자세 등에서 바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 버릇, 무심코 좌우로 상체를 흔드는 버릇 등도 가만히 생각하면 아버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고 아내나 아이들, 혹은 가까운 인척들이 자주 이야기 한다. 그래서 DNA는 숨길 수 없나 보다. 이건 유전적 형질 닮음에도 영향을 받겠지만 평생 가족으로서 생활패턴을 공유함으로써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부터 한 부모 가정, 조손 가정을 비하(卑下)해서 결손가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상식에 어긋나는 행태를 자행하면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본데없는 인사(人士)라고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본데’는 본받을 만한 롤 모델이 없는 환경이란 의미다. 바로 말해서 부모 중 누가 결손(缺損)되면 자식이 본을 볼 데가 없다는 뜻으로 무척 경멸하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가장 큰 사례가 아버지, 나, 첫째 아이의 직업적 가치관 공유 같다. 희한하게도 3대(三代)가 모두 교직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다. 사범학교 출신의 아버지, 사범대학 출신의 나, 교육대학 출신의 첫째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솔직히 아버지가 나에게 교사되라, 내가 첫째에게 교사되라고 한 마디 듣거나 권유한 적도 없었다. 말년에 동네경로당에서 한학을 강의하시면서 벽암(碧巖)선생이라 호칭을 들었던 할아버지의 가르치는 과업까지 넣으면 4대(四代) 교육자 집안이 된다.

   또 하나는 기록벽, 메모 벽이다. 또한 기록, 메모한 것을 쉽게 폐기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평생 일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의 서가에는 현직에 계실 때 정리해 둔 수십 년 된 각종 초청장, 부고, 청첩장, 100개도 더 넘을 것 같은 통장 등이 서랍에 고스란히 정리돼 있어서 혀를 내 두를 지경이다. 아버지께 이런 기록물은 모두 당신의 생애 기움, 나아가서 당신 생애자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2023.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