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1/3)
청솔고개
지난 5월 26일 찔레꽃 향내도 그윽할 적에 초등학교 동기회 모임이 있었다. 고향 마을에 아직 그대로 자리 잡고 있는 초등학교 교정에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술 한 잔 할 터이니 연락해서 가는 차편에 편승했다.
내가 편승해서 가는 차의 주인인 동기는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친구로 직업군인 출신이다. 그 동안 여러 일을 해본 친구로 자칭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위인이다. 여러 직업 체험이 화려한 만큼 입담도 대단하였다. 국산 최고급승용차 안에는 공모전에서자작 가요곡이 선발되어서 본인이 직접 부르고 녹음한 노래 테이프가 있었다. 인근의 명산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녹음된 테이프의 노래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내가 들어도 제법 잘 부른 것 같았다. 요즈음은 워낙 전자장치로 가공된 노래가 판을 치는데 , 자세히 들어보니 민요조라서 호소력 있어 제법 괜찮은 노래였다.
시내에서 먹을 것 실어서 모교에 도착하니 모교 교문이 꽁꽁 잠겨 있었다. 우리는 잠시 황당했다. 모교에서 동기회를 한다면 으레 있을 법한 약간 들뜬, 부산함 같은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안주 등 먹을 것을 실은 차를 교정에 주차할 수가 없었다. 좀 더운 날씨였지만 음식물 등 준비한 것을 그대로 차안에 두는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공휴일에 학교를 지키는 일직은 없고 경비용역업체에서 대행 관리한다고 한다. 다만 교문을 여닫는 일은 이 마을에 있는 용역이 처리한다고 한다. 이런 농촌 학교의 실정을 학교에 근무하는 나도 잘 몰랐으니 다른 친구들은 오죽 어리둥절했겠는가.
학교 주변도 온통 논이다. 요즘 모내기철 농번기가 되어도 들판에 농사를 짓기 위한 사람들을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격변하는 농촌이다. 이런 농촌 실정은 알고 있었지만 시골 학교의 자세한 변화는 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 유소년시절이다. 모내기철이 되면 큰일꾼들은 핫바지를 걷어붙여 튼실한 종아리와 장딴지를 자랑한다.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오곤 한다. 큰일꾼들은 모심기하는 동안 한 줄 다 심고 모의 줄을 옮길 때쯤이면 굽혔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흐흐흐이익……, 어디후후야……, 허허후후야.....,”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당시 나로서는 요상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⁰메나리를 더러는 휘파람 불 듯이, 때로는 뇌까리듯 퍼질러 낸다. 이 흥겨운 메나리 곡조를 노래 삼아 손놀림이 더 바빠진다. 이미 써레로 썬 무논을 철벅이며 사월 긴긴날을 모심기로 일삼던 큰일꾼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이제 봄철 내내 베어낸 푸성귀가 논에서 썩어 북적북적 거품이 일 때쯤, 이렇게 논 손질을 하고 난 뒤에는 온 들녘이 ¹미영베로 지어입은 허연 ²주적삼을 입은 모내기 일꾼들로 흥청대었던 그 때의 모습은 없다. 다만 띄엄띄엄 보이는 이앙기 부리는 몇몇 일꾼들이 고작이다.
이렇게 고향 모교 교문 앞에서 어린 시절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드디어 교문이 열렸다. 나는 먼저 교정의 풍경에서 내가 공유할 추억의 소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40년도 더 전의 일들에 얽힌 상념(想念)들이 휘익 불어오는 들바람처럼 한꺼번에 몰려든다. 상념의 조각들을 모아서 모자이크로 삼아 추억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아직 미완성(未完成)된 모자이크에 윤곽이라도 그려 넣어야 한다. 나에게 오늘의 이 모임은 바로 이러한 그림 그려 넣기다.
내가 학교 울타리 너머 논둑길을 걸으면서 돌 하나에 풀 한 포기에 추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이에 몇몇 동기생들이 모여서 자리를 깐다, 음식을 차린다 하면서 부산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들 중에 내게 낯익은 친구들을 찾아보았다. 멀리서 일부러 헤아려보니 넷 중에 하나도 안 되는 것 같다. 비록 나는 그들과 공유하는 과거의 시간 혹은 추억이 빈약하다하더라도 그들이 나와 공유하였거나 공유하고자하는 시간은 나의 인생 사이클로 보아 나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는 이 모임에 이렇게 남 먼저 나와 그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고향 마을과 그 마을에 자리 잡은 모교에 와서 보니 새삼스레 그 시절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 적, 즉 1962년도 내 나이 열한 살 나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체험을 겪는다. 그 때부터 간단없는 이러한 단절은 내 생애를 두고 계속 된다. 1960년의 4.19혁명, 1961년의 5.16군사정변이란 역사적 격변을 맞닥뜨렸을 때 나의 인식과 체험은 유년기(幼年期) 수준 그대로였다. 격변의 소용돌이가 나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했다고나 할까?
그 사연인즉슨 이러했다. 여기 고향 모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조부와 부모님을 모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갑자기 정반대 쪽에 있는 면 소재 학교로 전출된 사단이었다. 이렇게 원치 않는 임지로 멀리 날리게 인사 조치된 것을 두고 아버지는 혁명정부의 공직자 기강을 잡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었다고 다소 억울한 듯이 자주 말씀하셨다.
그해 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봄이 깊어 가는데 소 구루마에 이불 보따리며 살림을 싣고 신작로를 따라 60 리는 족히 되는 짧지 않은 이수를 터덜거리며 떠나가는 모습이며, 구루마를 끌고 간 우리 집 상머슴인 ‘아리랑 우공(牛公)’(?)을 부엌으로 모셔 재우려는데, 그 사택의 집 구조가 너무 낯 설어서 그런지 한사코 들어가려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결국 한데서 재웠다면서 그렇게 애먹은 이야기며……. 이러한 우리 가족 이주(移住)의 역사(歷史)는 그동안 어머니의 단골 이야기 메뉴였었다.
가족사(家族史), 특히 주생활(住生活)은 학교 사택(舍宅) 생활 아니면 셋방 생활 신세를 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한 곤궁한 생활로 인해 우리 어머니가 느끼었던 비감(悲感)의 정도는 날이 갈수록 증폭 재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자주 그런 상황을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내가 마치 그 최초의 우리 가족의 소 구루마 이주 행렬에 동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하였던 것이다.
당시, 5.16 정변의 회오리바람은 대단했었다. 모든 국가기관은 군이 장악하고, 최고 권력비상기구로 국가재건최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느닷없이 교사들에게도 국가재건이라는 구국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재건복이라는 흑갈색 코르덴 제복을 입게 하고, 교사들 가슴에 하얀 바탕의 명찰을 달게 하였었다. 그 때는 어린 나로서는 그런 변화의 참된 의미를 한동안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다만 2년 전까지만 교사가 목조라서, 쉽게 두세 개 교실의 앞 뒤 벽을 트고 조립한 강당에서 학예회 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진 그 무엇으로 어렴풋이 감지했었을 뿐이다.
학예회 때는 ‘팔려가는 당나귀’라는 국어책에 나오는 동극(童劇) 공연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 찬가”를 본 무대에서는 더욱 드높이 부르도록 다그친 사실과는 너무나 달라진 상황에 대한 막연한 깨달음 정도였다. 그 찬가는 당시 교과서는 물론 모든 출판물 뒷면에 인쇄된 ‘우리의 맹세 1, 2, 3’과 그 궤를 같이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맹세 하나를 외우고 있다. “우리의 맹세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이다. 한국전쟁 직후, 북진통일 노선을 호기롭게 주창하던 자유당 정권의 이념이었던 것이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해이라서 더욱 기억이 생생하였던 것이다. 지금 와서 보니, 국가와 개인 그리고 역사의 해석과 평가에 눈을 뜬 뒤라서, 일련의 그 역사적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오늘 모교의 창창하게 우거진 벚나무, 수양버들 숲 밑에서 나는 이러저러한 회상의 여행을 끊임없이 이어간다.[위의 글은 나의 유·소년기(幼少年期)를 회고한 것이며, 2002년 5월 말에 쓴 것임, 앞으로 몇 차례 나누어서 실을 것임.] 2020. 5. 27.
[주(注)]
⁰메나리 :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일부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 일종의 노동요임. 일명 ‘미나리’라고도 함
¹미영베 : ‘무명베’의 토박이 말
²주적삼 : ‘바지저고리’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