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3/3)/이방인으로서 관찰자 시점으로 나눠가질 만한 추억 조각 하나라도 취하려고 애쓴다

청솔고개 2020. 5. 29. 21:15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3/3)

 

                                                                                                                                                      청솔고개

 

  어린 시절 추억의 공유(共有)가 서로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들은 다수이고, 나에 대한 공유사항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단 한 사람, 공유사항이 그들보다 훨씬 더 적다. 참 답답하고 난감한 노릇이다. 그들이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마치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해가듯이, 세세(細細)한 부분까지 이야기의 맥락(脈絡)을 조합해 갈 때, 나는 그 공간과 시간의 배경 밖에서 존재한다. 스토리 속에 잠깐이라도 등장하는 인물은 못 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 들어주는 외로운 청자(聽者)일 뿐이다

  작년에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올해 만나면 좀 좋아진다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다. 작년 1년 간 서로 함께 한 시간만큼 형성된 인상이나 기억의 편린(片鱗)이 공유의 전부다.

 

  나는 이들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의 공유는 별로 없다.

  나는 여기 친구들과는 6년 동안 3년 2개월 정도 공유했었고, 그들끼리는 6/6 모두를 공유했다. 나는 그들과 초등 시절의 절반 남짓을 공유한 셈이다. 작년에 만났다고 해서 그때 겪은 몇몇 일들을 가지고 기억이나 추억의 공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의 초등학교 6년은 이산(離散)의 역사다. 두 번 째인 ㄱ면 소재 학교에서 0.8/6, 세 번 째인 ㅎ면 소재 학교에서 2/6 공유의 지분이 있다.

  지금 나는 그들과는 화학적 융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곁에 있어도 자연스럽지 않고 여전히 불편하다. 나는 그들과 좀 비껴 앉은 자리로 옮겨서 모가 심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논 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서 멍하니 옆에 핀 찔레꽃 한두 송이를 뜯어서 물끼에서 흘러나오는 도랑 위에 띄워 보곤 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이다.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집 증조부님, 조부모님께서 모두 천수(天壽)를 하셨다. 그분들은 여기 학교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지나 자리 잡고 있는, 내 안태 고향에서 오리쯤 떨어진 선영(先塋)에 잠들고 계신다. 거기서 그분들은 우리 마을의 이력(履歷)을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죽으면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영면(永眠)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듯하다.

  나의 초등학교 학력 난에는 연. 월 순으로, 3.2, 0.10, 2.0으로 기록된다. 어린 나이 두 차례의 전학에서 나는 생판 낯선 공간으 로 버려지거나 내몰리는 기분에 쫓기게 되었다. 나의 정체(正體)성은 조금씩 불안해져 갔다. 새로운 주변에 익숙해지기까지 생기는 막연한 불안은 스트레스로 작용했었다. 그것은 때로는 가벼운 잽이 되고, 때로는 강렬한 어퍼컷으로 나의 정신체계를 타격한다. 낯선 교실, 낯선 친구들과의 맞닥뜨림으로 가뜩이나 숫기 없는 나는 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평생토록 그때의 그런 기분과 분위기를 심하게 타게 된다.

 

  다음은 두 번째 학교, ㄱ면 ㅇ학교 동기회 모임 이야기.

  이 친구들이 이런 반의 반 쪼가리 동기인 나를 그래도 동기생이랍시고 자꾸 동기회에 출석하라고 한다. 처음에는 내가 여기서 입학도, 졸업도 안 했는데 뭐 동기 자격이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고사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요청에 계속 뻗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4-5년 전부터는 1/6의 공유 지분에도 못 미치는 ㄱ면 ㅇ학교 모임에 나가보았다. 처음 나갔을 때 내가 겪은 불편함, 부자연함은 컸다.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다만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였거나 학교사택 바로 이웃에 살던 몇몇 극소수 동기들만 기억에 있고 나머지는 전혀 기억(記憶) 상실(喪失)이다. 아버지의 그 학교 근무 사실로 그나마 최소한의 기억을 그들에게 끄집어내 수는 있었다.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그 상황은 더욱 가관(可觀)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공유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단절과 소외의 느낌은 늘 이렇다. 기억이 없으면 인식도 없다. 새로운 기능이 있는 타임머신이라도 개발돼서 40년 전 기억을 소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만의 친구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머리와 가슴에서 기억 사진 장면 하나씩을 꺼낸다. 그걸 가공하고 윤색해서 “하하, 호호”하면서, 멋진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설을 풀고 있을 때,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인의 말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래서 누렇게 절어 있더라도, 그때 사진 한 장이라도 내게 남아있다면 나는 더욱 간절한 기분으로 기억을 소환해 볼 것이다. 아니 뭐라도 좋으니 그 때의 기록의 단서가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이토록 참담하고 당혹한 기분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도 좋고 공책쪼가리도 좋다. 낡아빠진 낙서나 메모용지도 좋다. 이건 기억상실증환자에게 기억을 되찾아 주는 치료제다.

  나는 여기서 영원한 아웃사이더.

  그리하여 나도 조상님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 뒷산에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모두들 좌정했다.

  저들은 숱한 얘기의 꽃으로 추억의 향기를 풍길 것이다. 나에게는 소외와 기억상실증에서 오는 한숨이다.

나는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관찰자 시점으로 나눠가질 만한 추억 조각 하나라도 취하려고 애쓴다. 그러니 남아서 시간을 같이해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들과의 기억의 공유 대열에 당당히 합류할 것이다.

  바로 옆 학교산의 봄 꿩 울음이 유난히 외롭게 들린다.

[위의 글은 나의 유·소년기(幼少年期)를 회고한 것이며, 2002년 5월 말에 쓴 것임]

 

                                                                                     2020. 5. 29.

 

[주(注)]

물끼 : ‘물꼬’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