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
청솔고개
오월은 아카시아 꽃으로 시작한다.
해마다 오월만 되면 선명한 영상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내 청춘 시절, 군 생활 때, 병영 주변의 울타리로 심어져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더미다.
새벽 두 시, 벌써 서산으로 달은 지려하는데, 보초교대하기 위해 철모를 쓰면 한 떨기 밤바람이 휙 불어든다. 그 때 훅 풍기는 아카시아의 향훈. 미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우는 달빛 아래, 휙휙 불어드는 오월의 밤바람에 아카시아 향내가 진중에서 하늘로 흩어진다.
해마다 오월, 아카시아 꽃더미만 보면, 사십년도 더 전, 내 감성과 열정이 솟구치던 열혈 청년 시절의 그 순간순간이 떠오른다. 아카시아 꽃바람이 휙 불어들 때, 그 밤의 향과 색과 빛은 평생 나에게 천형(天刑) 같이 새겨져 있다.
아이가 꼭 30년 후 내가 근무하던 그 부대의 예하 연대로 배속되어서 근무하게 되었다. 7년 전의 일이다. 그 해 나는 나의 30년 전 오월의 아카시아 꽃더미와 그 향기를 잊지 못해, 장문의 편지를 아이한테 보냈었다. 물론 그날 밤 아카시아 꽃 향훈을 회상하면서……. 어떤 사연으로 보냈는지 다시 보고 싶어서 그 때 아이한테 보낸 편지 원본이 있을 만 한 곳을 다 뒤졌으나 결국 안 보인다. 틀림없이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내가 얼마나 오월 한 밤 그 아카시아향훈을 그리워했던가 하는 것을 그 편지를 보면서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보이지 않고 대신 상자 속에는 내 20대 후반에 주고받았던 편지 뭉치가 눈에 띄었다. 내게로 향한 더없이 간절하고 곡진한 사연들, 숱한 고뇌와 절망 등으로 점철된 사연 하나하나가 나의 청춘 시절을 곧바로 소환하고 있었다. 더러는 편지지가 이리저리 서로 섞여서 누구의 이야기인지 뒤범벅이 돼 있었지만, 낡아서 헤질 듯한 손편지 뭉치 한 장 한 장에서는 먼지와 오래된 종이 냄새보다는 훅 불어들면 콧속을 스쳐가는 간절함, 진실함, 설렘의 향훈들이 배여 있는 듯 했다.
40년도 더 지났다. 지금 나에게는 나의 20대 후반 아카시아 꽃보다 더 진하게 풍겼던 순수와 열정, 고뇌의 감성의 향내음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얼마나 뿜어내고 있는가. 이제 나는 누구와 더불어 다시 그날 밤의 아카시아 향훈과 같은 설렘과 진실의 손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2020.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