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들길로/야트막한 강물 복판에는 쇠백로가 몇 마리 긴 주둥이를 처박고 있다

청솔고개 2020. 6. 2. 22:41

              들길로

 

                                                                                                                                   청솔고개

   새벽 3시 좀 지나서 잠을 깼다. 5시까지 어제 못한 글쓰기 작업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준비해서 7시에 산행 출발해야 한다. 6시 쯤 이른 식사를 했다. 이때 벌써 해가 돋아오고 북동쪽 뒤의 창문이 훤하다. 새벽 기운이 솟아난다. 새벽은 언제나 이렇게 누구든지 서둘러야 직접 맞이할 수 있는 멋진 시간이다. 새벽의 불그스름한 기운은 새날을 준비하는 에너지원이다. 참 오랜만에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 삶은 계란, 토마토, 브라질너트 등으로 속은 가볍게 채우되 에너지는 충분히 공급하려 한다. 6시 40분 쯤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다. 이것도 새벽 기운이다. 아파트 바깥 통로에도 아직도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산행 가는 길에도 새벽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시장 골목을 나서니 바로 오른 쪽에 멀리 보이는 오백년도 더 된 회나무 등걸이 돌로 된 성벽 옆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두 그루 짝을 이루고 있는 그 나무 위에는 미명에 멀리서 보니 참새인지 뱁새인지 모를 작을 새들이 재잘댄다. 까치 몇 마리가 큰 소리로 아침 인사를 한다. 고목 회나무 위의 까치집들은 언제나 그 고유한 건축술로서 주목을 받는다. 그냥 보면 어설픈 것 같지만 아주 단단하다고 한다. 늘 보이던 까마귀는 오늘 안 보인다.

   언젠가 친구들과 만나서 저녁 먹으면서 반주 한 잔 하고 차 한 잔 후, 저 성벽 위를 걸으면서 끝 간 데 없는 세상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저녁 저 검은 회나무 옆을 스치면 코끼리 장딴지 같은 나무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우리가 나무의 침묵과 밤의 어둠을 깨워주었다. 술기운이 살짝 남아 있던 나는 이 때다 싶어 호기롭게 사이트에서 새로 찾아 낸 애수에 가득 찬 옛 노래를 들려주어 본다. 나 혼자 듣기에는 아까운 정조의 노래였다. 내가 오랫동안 찾았던 내 취향의 가요였다. 무슨 값진 보물이라도 발굴해서 폼 나게 전시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내 마음과는 달리 그 곡들이 너무 애조에만 빠져 있는 것이라서 자기들 취향은 아니라고 했다. 나의 정조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좀 섭섭하였다. 고조된 소리로 ‘애조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 본성을 자극하는 것이 음악이다. 이런 낭만 조를 몰라보면 안 된다.’고 강변했던 기억이 난다.

   큰 길로 나선다. 이팝나무 가로수는 지난 달 초에 벌써 눈꽃을 흰쌀로 대지에 다 공양한 덕분인지 더욱 푸르러진 기운을 자랑한다. 청록색의 잎들과 윤기 나는 갈색의 줄기가 새벽 거리를 파수하는 병사들처럼 도열하고 있다.

   왼쪽은 연꽃 밭인데 물이 질벅하다. 마치 벼 못자리 같다. 며칠 전 옮겨 심은 연꽃 줄기와 잎이 벌써 무성하다. 이제 한 달 지나 7,8월이 되면 여기도 백련, 홍련화의 우아한 자태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고 또 숙연하게도 할 것이다. 그 옆에는 또 부용화의 모종이 한창 자라나고 있다. 연화와는 달리 마른 땅에서 자란다. 여름의 끝자락에 부용화가 핀다. 그 맑고 밝기가 비할 데 없다. 무궁화를 흡사 닮은 꽃이다. 부용은 아름답고 고와서 양귀비꽃과 더불어 예로부터 미녀의 대명사다. 여인이 고운 자태가 무엇인지 그 느낌이 와 닿지 않으면 부용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멀리 토성 위에는 아직 새벽 기운을 덮어쓴 떡갈나무, 참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검푸르게 그늘을 짓고 있는데 그 위로 아침 햇살이 금빛으로 비치고 있다. 이제 완연한 녹음으로 변신 중이다.

   그 토성 앞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가에는 갈대가 새잎을 뽑아 올리고 있다. 연록색이다. 그 밑으로 하얀 모래톱에 희고 붉은 기운이 비껴있다.

   들길로 접어든다.

   한 달째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아 땅은 한껏 메말라 있다. 먼지가 풀풀 날린다. 그래도 길가와 풀밭의 풀들은 이 새벽만큼은 밤새 내린 이슬 기운을 머금고 왕성해 보인다.

   길가에는 이십년도 더 전에 목조로 지은 작은 찻집이 이제는 더욱 거무스름한 기운을 띠고 있다. 한 번은 무인 찻집이라고 해서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전통차로부터 커피까지 골라서 타 먹고 알아서 값을 지불하면 된다. 들판에 이런 찻집 하나는 그 있음만으로도 행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 같다. 찻집 울타리에 새빨간 줄 장미, 다발을 이룬 샛노란 장미가 열정을 뿜어내고 있다. 지금은 그래서 장미의 계절이다.

   그 옆에는 이앙기가 흙투성이로 젖어 서서 농부를 기다리고 있다. 이어서는 앙증맞은 메꽃들을 개량한 듯 한 곱기도 한 연분홍 꽃 무더기가 길가에 띠를 이루고 있다. 모종을 부어 놓은 듯이 벌써 열흘 넘도록 피어나고 있었다. 하도 고와서 무슨 꽃인지 이름을 물어보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

   산마을 옆길을 지난다. 올봄에는 홍매화가 그 기품을 자랑하더니 그 옆으로는 대숲 천지다. 지금쯤 저 안에는 죽순이 불끈불끈 솟아나 있을 것이다.

 

   다시 시냇가 길이다. 양 옆으로 금잔화 꽃물결이 새파란 시냇물과 나란히 달린다. 그 사이로는 질경이가 한창 돋아나고 있고 어린 개미들이 어디 이사를 가는지 긴 행렬을 하고 있다. 시냇가 둑에는 개망초와 미타리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크고 있다.

   바로 물가에는 시퍼런 줄기를 자랑하는 창포가 꽃망울을 키우고 있다. 그 샛노란 꽃을 빨리 보고 싶다. 더 안으로는 갈대숲 사이에 부들 몇 대가 키 크는 자랑을 하고 있다. 한 달만 지나면 꽃을 구경할 게다.

야트막한 강물 복판에는 쇠백로가 몇 마리 긴 주둥이를 처박고 있다. 지난달까지 행인들의 눈요깃감이 되었던 오리와 청둥오리는 어디로 떠나갔는지 이제 안 보인다.

   산으로 접어든다. 보름 전에 꽃망울 터뜨린 아네모네는 새하얗게 칠해진 어느 집의 나무대문을 배경으로 일렬종대로 줄서 있다. 막 솟아오르는 햇빛에 노랑, 분홍, 자주, 하양, 빨강 등 오색으로 피어나고 있다. 꽃말처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무상함을 하소연하고 있는가.

   갑자기 어둑어둑하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양 옆은 애기단풍 숲이다. 생기다 만 애기 손바닥 같은 자그마하고 얄브스름한 잎들이 천만 개나 모여서 짙은 그늘을 이루고 있다.

   이제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2020.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