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그날, 한 이별(離別)의 기록 1/그 영면(永眠)의 장소는 참으로 아름답고 시적(詩的)이며 명상적(冥想的)으로 느껴졌다

청솔고개 2020. 8. 22. 21:58

그날, 한 이별(離別)의 기록 1

                                                                                  청솔고개

   할아버지께서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다는 어머니로부터의 다급한 전화를 그 전날 밤에 받고 그날 밤새 가실만한 곳은 다 찾아 다녀도 행방이 묘연했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으셨다고 어머니는 넋을 놓고 계셨다.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 다니시던 경로당에서 어르신 한 분이 어제의 할아버지의 동정을 제보해 주셨다. 어제 아침에 목욕하러 가셨다는 장소로 급히 가 보았다. 그 분은 둑을 따라 가셨다는 경로를 자세히 알려주셨다. 아버지, 숙부님, 나 세 사람은 황망하고 긴장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찾아 나섰다. 안 계셨다. 목욕하셨다는 곳에는 유류품 하나 없었다. 물속에 바지를 걷고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남쪽 상류로 2,30미터 쯤 강변 갈대밭 길 위로 가서 할아버지를 찾으시던 숙부님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앗! 빨리 빨리......”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상황이 진행된 것을 알았다. 아버지와 나는 온몸이 가시덤불과 갈대에 휘감기는 것도 잊은 채,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비스듬히 쉬면서 잠자듯 눈을 감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내 시선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그 순간 숙부님과 아버지께서는 단말마의 오열을 터뜨리셨다.

   “아이고 울아부지. 어째 여기 이래 계시는교........?” 나는 이럴수록 숨을 차분히 가다듬고 현 상황을 직시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거기엔 그렇게 평생토록 이 장손한테 다정히 일러주시고 깨우쳐주시던 할아버지께서 누워계셨다.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다. 갈대와 수초, 덩굴이 사람 키를 넘어 무성하게 자란 강 한복판 모래톱 사이로 졸졸 흐르는 맑은 강물 바로 옆에 약간 모로 오른쪽 팔을 베개 삼아 편히 누워계셨다. 중절모는 따가운 햇살을 가리기 위해서 약간 이마를 덮고 있었다. 잠을 청하신 듯 안경도 코 위로 걸쳐져 있고 한쪽 발은 발이 아파서 그러신 듯 벗고 있었으며 얼굴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맑고 하얬다. 입은 약간 다물고 있었는데 입매에는 가느다란, 어렴풋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아, 망인(亡人)의 모습이 어쩌면 이리도 화평하고 고요해 보일까.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님…….”하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나직이 할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북받쳐 오르는 슬픔도 느껴지지 않고 더욱 담담해지고 차분해지는 마음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평생 사람의 도리, 예의, 분수만을 지키시었다. 한 그루의 고목처럼, 벽암(碧巖)이란 호(號) 그대로 푸른 이끼로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큰 바위처럼 사셨다. 그렇게 한 생애를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오시다가 이제 이 자리에서 이제 영면하신 거다. 이제 이 강심(江心)의 맑은 물소리를 노래삼고, 무성한 갈잎을 베개로, 이불로 삼아 갈대숲속에서 영면에 드신 것이다.

   “수다 즉 욕다(多卽辱多)"라고 틈만 나시면 되뇌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귀에 쟁쟁하다. 평소 한 번도 함부로 벗어놓으시는 법이 없으신 흰 주적삼에 모시두루마기처럼 바람결에 펄럭이며, 그 욕다라는 것도 저 맑은 창천(蒼天)에 훌훌 날려 보내시고 고고(孤高)한 한 마리 산양(山羊)처럼 사신 분.

   문득『싯다르타』에서 헤세가 속삭이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하나의 은밀한 장소, 숨은 피난처가 있다고 우리는 언제나 그 속에 틀어박혀서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룰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참으로 적다고.”

   9년 전 할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 계시던 할아버지의 만년은 참 고적(孤寂)하셨다. 할아버지는 이제 당신의 피난처로 이곳을 찾아 주무시는 것이다.

   그날 갈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이에 화답하는 강물소리가 영겁으로 이어지는 그 영면(永眠)의 장소는 참으로 아름답고 시적(詩的)이며 명상적(冥想的)으로 느껴졌다.

[위의 기록은 1994년 여름 할아버지 가신 그날, 내 생애 기록 중 일부를 꾸민 것임]

                                                     2020.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