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태풍이 준 선물/하나가 사라지면서 또한 하나를 남기어 보태주는 자연의 이법이거늘

청솔고개 2020. 9. 4. 23:15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태풍이 준 선물

 

                                                       청솔고개

   며칠 전 엄습한 태풍 마이삭이 한밤에서 새벽까지 이 지역을 휩쓸고 간 뒤, 다음 날 오후, 바람은 아직 세었지만 모처럼 보는 짱짱한 햇살이 탐나서 산행을 하러 등산로 초입에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에는 ‘태풍으로 출입금지’라는 안내 문구가 걸려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옆의 다른 출입로 해서 올라갔다. 이 길은 늘 내려오던 길인데 오늘은 역발상을 한번 발휘해서 반대로 올라가 보았다.

   초입부터 평소보다 배나 더 커진 계곡물 소리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마치 성난 멧돼지 수십 마리가 저돌(猪突)해서 나무 밑 둥부터 흔들어 놓아 잔가지며 약한 잎들이 추풍낙엽이 돼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군데군데 미끈하게 잘 생긴 아름드리 적송마저 뿌리 채 뽑혀서 누워 있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잔가지와 나뭇잎들의 잔해도 평소에 눈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산행 길을 분간 못하게 하지만 마치 허들 경기의 허들처럼 가로 막대가 돼 앞을 막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 기둥들의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초속 몇 십 미터 바람 위세에 버티다 못한 약하거나 너무 센 나뭇가지와 잎들은 순식간에 추려지고 난 뒤라, 평소 빽빽하던 숲속의 공간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마치 대대적인 간벌 사업을 한 뒤 같았다.

   또 하나, 막바지 익어가는 밤송이들이 오솔길 움푹 파인 곳에 굴러와 소복이 모여 있다. 어떤 것은 벌써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내가 발로 한번 툭 차니 그냥 밤톨이 터져 나온다. 아직 해말간 햇밤도 있지만 제법 익어 옆은 갈색을 띤 것도 많이 보인다. 나는 약속 시간도 있고 해서 서둘러야 한다면서 이걸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일단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배낭 속에 두꺼운 비닐봉지에다가 밤송이 까지도 않고 그냥 담아본다. 급히 담으려고 하다 보니 손가락이 밤 가시에 찔려 따끔거린다. 그래서 이번엔 두꺼운 등산화 발바닥으로 밤송이를 짓이겨보았다. 어떤 놈은 쉽게 입을 벌리고 밤톨을 토해 내기도 하지만 아주 질긴 놈도 있다.

   암만 바빠도 이 재미를 놓질 수 없어 결국 중간에 샛길로 빠져 내가 백번은 넘게 올랐을 일천바위 나의 명상 터 행은 접고 바로 낙우송 숲으로 갔다.

   올라갈수록 물살은 더욱 세지고 햇살은 더욱 짙어지나 바람소리 물소리 역시 청량하다. 물길이 새로 난 것 같아서 지형도 많이 낯설어 보인다.

   드디어 낙우송 숲에 도착, 여기도 새의 깃털처럼 생긴 낙우송 잎들이 져서 일대가 아직 훑어져 내려오는 물 흐름으로 산록 습지가 된 바닥을 덮고 있다. 2,30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역광의 햇살이 서광이나 빗살처럼 꽂히고 있다. 햇살의 비침과 번짐이 찬연하고 환상적이다. 나는 도취해서 어질어질하다. 앞이 갑자기 감감해지기도 하고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나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음료 하나 마시고 잠시 눈을 감고 참 오랜만에 명상에 빠져본다. 나의 모든 것부터, 다음으로 가족과 주변으로 생각을 넓혀본다. 그 생각 틈으로 숲을 일렁이는 바람소리, 그 잎과 가지들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불은 물소리, 초가을 풀벌레들의 합창이 뒤섞인 독특한 화음이다. 초자연의 코러스다. 몸은 온통 땀에 젖어있지만 마음은 한없이 청량하다.

   내려오면서 개울가에 앉아서 얼굴 씻고 머리도 감아본다. 정신이 확 돌아온다. 이제 극성스레 달라붙던 모기도 더 이상 안 쫓아온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물소리는 폭포 소리다. 높이 5백 미터도 안 되는 이 작은 산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물을 품고 있다가 끊임없이 내리쏟고 있는가. 그 위대함이 나를 감동시킨다.

 

   다음 날, 태풍 지나간 그 이틀 뒤다. 오늘도 어제 탐스런 밤송이 생각이 떠올라서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급히 물 하나 음료 하나만 챙겨서 출발했다.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은 어제 못 갔던 일천바위 명상 터를 꼭 가야한다는 것.

   이제 아침 산행과 달리 오후 산행은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늘은 더욱 짙게 드리워진다. 오늘 오후 3시 가까이 출발했더니 벌써 제법 짧아진 해 때문에 지난여름보다는 그늘이 빨리 진다. 그래서 산행이 더 쾌적해진다.

   오늘, 또 사라진 것들을 보았다. 어제 이 산행 길을 통제한 것은 밤새 쓰러진 나무를 처분하기 위함임을 오늘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현장, 군데군데 전기톱으로 절단된 굵은 적송의 등걸에서 진한 솔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주변엔 톱밥이 짙게 깔려있다. 갈수록 솔향기는 더욱 진해진다. 살아서는 송홧가루로, 죽어서까지 솔향기로 보답하는 적송의 한 생애를 본다. 어제 산행 때 멀리서 들리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바로 이것을 자를 때 생기는 굉음이었음을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문득 어린 시절 동네 우물가에서 송기를 물에 우려낸 후 만든 송기떡을 맛보았었는데 바로 그 향이 지금 여기에 진동하는 것 같다.

   호올로 일천바위를 오른다. 한낮의 햇볕으로 바위는 따끈히 데워져 있다. 이게 찬 바위보다 나는 낫다. 바로 옆 소나무 가지 그늘이 나의 얼굴을 가려 준다. 그 솔잎 사이로 불어드는 초추의 솔바람, 함께 다가오는 초추의 양광.

   이 모든 것은 하나가 사라지면서 또한 하나를 남기어 보태주는 자연의 이법이거늘.

   저 아래 자부룩한 솔숲 사이에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메조소프라노로 초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2020.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