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숲을 예찬함(2/2)/ '나를 제발 내버려 두오'

청솔고개 2020. 9. 3. 05:42

숲을 예찬함(2/2)

                                                                     청솔고개

 

   오늘 아침 모처럼 이층 큰방에 들어갔다가 빗소리 틈에서 들려오는 산비둘기의 울음이 너무 가까이 들려서 창밖을 내다보니 짙어진 목련 잎, 감나무 잎에 가려져 울음의 진원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차 소리, 텔레비전 소리, 컴퓨터 소리, 매캐한 차 연기에 새들이 지쳐갈 때, 우리 집 나무들은 그들에게는 도심의 오아시스다. 새들은 이 몇 그루 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어서 늘 찾아와서 편히 쉰다. 이제 잎이 무성해서 한 참 찾아봐도 어느 가지 끝에 매달려 우는지 모를 정도로 제법 짙은 숲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리라.

   그동안 흰 깍지벌레에 감염된 감나무를 베어버리려고 몇 번이나 별렀지만 곁가지만 몇 개 속아버리는 정도였다. 이렇게 9월 초순인데도 거의 홍시가 되어서 떨어져버리는 감이 선사하는 ⁰풀돼죽을 감수하면서도 베어내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틀림없이 내 기억 속에 어린 시절 감나무나 ¹꽤양나무에서 감이나 꽤양을 딸 때, 맨 꼭지에 몇몇 개는 그냥 내버려두는 습속 때문일 것이다. 그 몇 개의 인동과(忍冬果)는 겨울 내내 까치를 비롯한 까마귀, 뱁새, 멧새, 동박새, 참새 등 텃새들의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곪고 터지고 마당만 버리는 병든 감 알을 키우는 것도 그러한 유년 시절의 체험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맨 꼭대기에 따지 못하고 남아 있었던 한 접 가까이 되는 감 먹이를 찾아 까치가 연일 까악까악했던 그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은 후는 더욱 그러하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자연과의 조화. 바로 그것이다.

   오십 줄에 접어드는 우리 내외는 대화의 시간과 심신의 단련과 휴식을 위해 틈만 나면, 길 건너 점잖이 자리 잡고 있는 숲을 찾는다. 숲 속에서 걷기도 하고, 가볍게 뛰기도 하고 바람도 쏘이고 풀 내도 맡으면서 이 순간을 하루의 생활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몸이 아파서 자리에 드러눕지 않은 한 우리들의 가장 소중한 시간은 반드시 맨 먼저 확보한다. 그런데 숲 속 팻말에 쓰여 있기를 '숲 속 도토리를 털지도 말고 가져가지도 마십시오. 숲 속 다람쥐, 청설모, 비둘기 등 들짐승들의 먹이가 됩니다.'라고.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집에서 오래되어 뜬 곡식이나 마른 음식, 쉰 밥 등은 꼭 챙겨서 산책할 때 가지고 가서 굵은 나무 밑둥치에 군데군데 놓아둔다. 그런데 이 먹이들이 이틀을 넘기지 않고 깨끗이 치워진다. 많은 들짐승들이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걸 볼 때마다 우리는 정말 주는 기쁨, 먹이는 기쁨, 살리는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심지어 아직 먹어도 될 곡식도 제법 뿌려 주었다. 그때마다 깔끔하게 치워지는 먹이 준 자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한없는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시청에서 몇 년 전에 아기 다람쥐를 일부러 사서 이 숲 속에 풀어놓았다는데 그 후 그 다람쥐의 숫자가 줄었으면 줄었지 더 느는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무심한 욕심들이 들짐승의 먹이를 약탈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먼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꾀를 배우고 싶다. 몸소 실천하고 싶다.

   여기에는 토종이고 외래종이고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우리 집 서쪽 작은 학교 운동장만한 빈터에 달맞이꽃이 지천을 이루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되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 짓는 그 이름 달맞이꽃' 그 꽃말과 이름만큼이나 가슴 아리게 하는 아름다운 달맞이꽃의 가수, 70년대 우수와 방랑의 맹인가수 이용복의 '달맞이꽃' 그 우수에 젖은 가사가 자주 되뇌어진다. 더욱이 달빛이 빈터를 가득 채울 때면 한 길 이상 크기로 숲을 이룬 달맞이꽃의 서늘한 자태에 토종이니 외래종이니 하는 것이 무어 중요한가. 그냥 빈터에 가꾸지 않아도 저렇게 달맞이하려고 깨금발/까치발로 큰 키를 더욱 크게 하고 참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달님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면 족한 것이다.

   그저 자연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연과의 공존' 거창한 것 같지만 그냥 자연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 자연에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 위한답시고 집적거리지 않는 것, 그래서 일찍이 '렛잇비미'(Let's It Be Me)라는 팝송가사가 생겨났는가!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개발'이 합리화되고 있는 이 엄청난 역리(逆理)가 존재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다.

   '나를 잊지 마시오'(勿忘草, Don't Forget Me) 보다 '나를 제발 내버려 두오' 라는 소리들이 천지에 미만해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001년 초가을에 쓴 것을 다시 정리한 것임.]

                                                                      2020. 9. 3.

 

[주(注)]

⁰풀돼죽 : ‘수제비죽’의 토박이 말

¹꽤양나무 : ‘고염나무’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