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가을날의 동화 1, 홍시 하나/내 몸은 곤두박질하고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청솔고개 2020. 9. 8. 12:39

가을날의 동화 1, 홍시 하나

 

                                                   청솔고개

   내가 초등 1학년 되던 해 어느 초가을 날로 기억된다.

   학교 갔다가 작은 사립문을 통해서 집에 들어오려는데 그 때 갑자기 내 눈에 꽂히는 게 하나 있었다. 감나무 맨 꼭대기에 달랑달랑 달려 있는 새빨간 홍시 하나였다. 홍시의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찐득한 씹는 맛, 혓바닥에 달짝지근하게 펴지는 맛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매었던 책보를 그냥 던지다시피 하고 나도 모르게 신들린 사람처럼 우물 옆 채전 밭에 있는 감나무를 정신없이 타고 올랐다. 맨 꼭대기에 있는 홍시가 탐이 나서 떨어지기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몸피가 유달리 작아서 어디 올라가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당시 내 몸무게가 20킬로그램도 채 안 된 걸로 기억된다. 날다람쥐 몸짓으로 맨 꼭대기에 다 올라가서 내 작은 손으로 홍시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딱하고 내가 딛고 있던 감나무 가지가 부러졌다. 가뜩이나 연한 감나무였는데 그건 썩은 것이었다.  그냥 내리꽂힐 때의 그  기분과 정신은 말할 수 없이 아득하고 기묘했었다. 순식간에 내 몸은 곤두박질하고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아래서 내가 홍시 따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던 한참 어린 바로 밑 남동생은 그만 심하게 놀란 나머지 울지도 못하고 작은 삽짝을 향해 뛰어 들어가서 엄마한테 그냥 “히야가 히야가…….” 하고 채전밭 감나무 쪽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밭 바닥에 떨어져 웅크리고 있는데 놀라서 달려온 엄마와 어린 동생을 보니 내 정신이 돌아왔다.  감나무의 홍시처럼떨어지는 그 순간 아뜩함, 멍멍함은 6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배, 가슴, 등 쪽을 중심으로 심하게 긁혔고 왼쪽 발목은 심하게 삐게 되었다. 한 동안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학교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기간 동안은 심하게 부은 발등을 치료하러 윗동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었다. 퉁퉁 부은 발목에 침을 꽂으니 약간 핏기가 도는 멀건 물이 배여 나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충격은 평생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서 이른바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 채전 밭은 그 후 메워지고 돋워져 마을 회관 터로 되어 버렸다. 개발독재시대 정부의 시범 사업에 포함된 것이다.

   고속도로변 농가 주택 정비 사업이라는 것은 당시 경부 고속도로 연도에 산재해 있던 옛집들이 지저분하게 보이니 구획을 대략 정해서 철거할 건 철거하고 나머지 집들은 그 당시 정부에서 정한 폼 난 모델로 새로 짓겠다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마을 허리를 지나는 길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서 길 아래는 다 철거해야 한다는 방침에 의해 철거된 것이다. 아버지는 처음엔 허락을 하지 않고 버텼지만 면사무소 담당자의 종용, 강요로 견디다 못해서 결국 굴복하고야 만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초등학교 교원으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그때 너무 쉽게 허락한 것을 두고 많이 후회하시는 걸 들었다. 끝내 버티어서 철거 안 된 집도 있었던 것이다. 그 집남은 억지로라도 남겨두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의 말씀을 자주 하시는 걸 들었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이 그 집과 관련된 생애 기억, 추억으로 남아 있으실 것이다. 그러니 더 아까우실 것이다.

   나중에 길 위에 있어서 새로 지어진 집들도 멀리서 볼 때 외양만 그럴듯하지 쓸모는 전혀 없다면서 하나씩 다시 지어야겠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듣곤 했다. 단열이 하나도 안 돼 미니 2층은 그냥 소 여물이나 사료를 넣어두는 허드레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내 유년의 뿌리가 내려져 있었던 그 집은 결국 내가 군에 있을 때 강제 철거 되었고 유소년 시절 숱한 기억의 조각들도 더불어 그냥 해체되거나 묻혀 버렸다.

   그 집 철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현재 시내 부모님 집에 오셔서 합가 하시게 되었고, 그 집터와 대나무밭 울타리, 옆의 세 도가리 논, 앞 채전 밭은 모두 평탄작업 후 마을 회관 터가 되어 버렸다.  그터는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금도 마을 회관 건물이 버젓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 참 묘한 느낌이 든다. 아직도 서로 잘 아는 마을 어르신을 만나면 그 때의 말씀을 한다.

   나중에 어머니가 전해주신 말로는 집이 철거되면서 그 집터가 마을에 팔리고 이사를 하는데 구루마, 디딜방아, 각종 농기구, 소구유, 크고 작은 단지, 항아리 등 손때묻고 정신이 서린 많은 도구들을 두고 오려니 너무 아까웠다고 하셨다. 결국 한 세기도 더 넘은 그 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남아 있는 것 중 쓸 만한 것은 다투어서 다 가져가 버리고 나머지는 태워버렸다고 한다.

   어쨌든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시내 집 공간에 그 모든 걸 담을 수는 없었지만 크고 작은 단지 몇 개, 키, 물레, 약과 만드는 틀, 갓, 중요 전적 등 옮겨 올 수 있는 것은 몇 가지는 아직도 큰집에 자리잡고 있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일깨주곤 한다.   

   

   내가 추락한 채전 밭에서 자라던 늦 상추의 대궁이의 쓰디쓴 맛 하며, 가끔은 뭐 때문에 심어 놓았는지 모를 한 두 포기 양귀비꽃의 선홍빛이 지금도 떠오른다.

                                                  2020.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