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머슴 아재
청솔고개
엊그제의 아버지의 심한 급성 설사증 때문에 마음이 쓰여서, 어제는 아침 산행을 못하고 바로 큰집으로 갔다. 엊그제에서 어제 저녁까지 열 번 이상 심한 설사를 하셨다고 한다. 어제가 임시공휴일이라서 병원은 쉬니까, 24시간 하는 병원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다행히 어제 아침, 아버지는 일단 지사제 약을 먹고 견뎌보자고 하신다. 하기야 지금 이 시국에 아버지를 어디 모시고 간다는 것도 큰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후 산행 약속을 잡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산행하는데 좀 땀이 난다. 날이 포근해지고 솔바람이 불어오니 연달래 꽃송이가 뚝뚝 지면서 눈물로 고여 있다. 꽃길 따라, 꽃송이로 나비와 벌들이 춤을 추면서 따라온다. 문득 아득한 어린 시절, 내 나이 다섯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보리밭 위로 노고지리는 흔적도 없이 아득한데, ‘노골노골 지리지리’ 울음만 온 하늘에 아득하다. 우리 집 큰머슴 아재는 힘이 세서 소깝과 깔비를 한 짐 지고 휘이휘이 잘도 온다.
오늘처럼 따스한 봄날이었다. 큰머슴 아재가 소깝단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집 옆의 논길을 따라 집으로 오고 있었다. 나뭇단에 탐스럽게 꽂혀 있는 참꽃다발에 흰나비, 노랑나비가 훨훨 따라 오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놀다가 그게 정신없이 좋아서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큰 삽짝 안으로 해서 마당 지나 소풀 두지 옆 나무배까리까지 졸졸……. 그때까지 큰머슴 아재는 내가 종종걸음으로 뒤 따라 가는 걸 몰랐다. 나도 참꽃다발에만 정신이 팔려 큰머슴 아재가 소깝단을 부린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 순간 내 작은 몸뚱아리를 덮친 진한 솔내음과 까마득한 어둠, 그만 정신 줄을 잃어버렸다. 참꽃송이에 눈이 먼 나머지 그 소깝단에 깔려버린 것이다. 엄마는 멀방에서 바느질 하다가 큰애의 비명을 듣고 문밖으로 내다보았다. 갑자기 밖에서 벌어진 상황을 목격한 울엄마는 그만 소스라쳐 놀랐다. 그 순간, 울엄마 배속에 들어있던 내 동생은 엄마의 애기 집에서 그만 흘러내려버렸단다.
이게 훗날 내가 커서, 들은 적이 있는, 배태된 내 동생 잃어버린 일의 전말이다. 애달픈 사연이다.
다섯 살 머슴애는 나비 따라 쫓아가고 이제 물결 같은 세월은 나를 쫓아온다. 큰머슴 아재의 참꽃방맹이가 세월 따라 나를 쫓아온다.
‘소깝단 사이에 꽂은 참꽃 한 다발에 흰나비, 노랑나비가 춤을 추며 따라온다.’ 훗날 어느 동화책인가 교과서에서 그림으로 본 듯도 하고, 내 꿈결에서도 한번 씩 그 장면이 선하다.
2020.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