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론
청솔고개
우리 집 뜰에는 이맘때면 돌냉이가 지천으로 벋어 있다. 온 화단의 흙을 덮어 버린다. 아내나 다른 사람들은 지저분하니 걷어내 버리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돌냉이 뿐만 아니라 민들레 대궁, 속새, 약쑥, 쇠비름……. 등 이름 모를 잡초들이 아침저녁으로 뿌려주는 물을 머금고는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요즘 화단 꾸미기에는 너무 인공적인 맛이 나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이색적인 화초, 나무를 구해다가 자로 재듯 심는다. 물론 화단 가꾸기는 개인의 기호에 따를 것이니 이것을 두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그런 도식적, 인공적인 조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어려서는 시골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자랐다. 들길 따라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이나 들풀들은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불굴의 생명력을 자랑하며 끈질기게 자라는 들풀,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꽃은 강가 자갈밭에 꼬질꼬질한 줄기를 솟구치며 뻗어나는 패랭이꽃, 보리를 베고 난 다음 논밭에 돋아나는 독새풀, 그리고 불붙을 듯이 달궈진 돌밭, 자갈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벋어나는 돌냉이었다. 논둑에서 그 화려하고 신비한 자태를 뽐내는 자운영의 기품 있는 꽃 빛도 잊어지지 않는다. 흔히 자주 볼 수 있는 이런 들꽃의 끈질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의 화단을 덮고 있는 돌냉이는 지금 노르스름하고 작아 보잘 것 없는 꽃을 피우고 있다. 오각 모양의 담백하고 청초한 멋을 내는 이 꽃은 참 오래 간다. 꽃이 너무 작아서 한 송이 한 송이 보면 차라리 초라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좀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묘한 조화에서 오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처음 화단을 꾸밀 때 제일 먼저 구해다 심은 것은 장미, 라일락, 살구나무, 감나무, 애추나무였다. 이런 큰나무 밑에서 돌냉이는 마치 이 나무들의 뿌리라도 보호하려는 듯이 탐스럽게 덮고 있다.
하루는 가까이 사는 처형 집에 갔다가, 처음 그 집 뜰에 무성하게 뻗어난 돌냉이 숲을 보았다. 그 왕성한 생명력에 끌려서, 풀조차 잘 나지 않는 불모지 같은 우리 집 뜰에 심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아무렇게나 뜯어다가 던져놓고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뿌려 주었다. 며칠 못가서 사막에 새로운 기적이 생겼다. 돌냉이 숲.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은 대단했다. 3년째 끈질기게 뻗어나는 돌냉이는 이제 내 집 화단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사막에다 진하고도 질긴 생명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돌냉이도 그 푸른빛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누르스름하게 퇴색해가고 희끄무레한 뜨물도 끼여 있다. 돌냉이가 우리 화단에서 이바지하는 또 하나는, 화단 흙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준다는 것이다. 화단의 흙은 항상 축축하다. 그래서 다른 생명들 무척 잘 자라나게 한다. 대체로 잘 안자란다는 감나무, 애추나무도 쭉쭉 새순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고 있다.
이제 난 지 열 달도 안 되는 우리 딸에게도 풀 한 포기 없어 벌겋게 드러난 꽃밭을 보여 주느니보다 비록 잡초일망정 푸름이 가득한 풀밭을 보여 주고 싶기도 하다.
잡초, 그것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것의 대명사다. 잡초 같은 인생이란 말도 있잖은가. 이제 나는 땅의 기운은 잡초에서 나온다는 걸 확인했다. 잠재된 힘의 원천은 바로 이 잡초 같은 삶은 산 민중들이다. 민초(民草)라는 말은 힘없는 하층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민초가 없이 어찌 제왕이 군림할 수 있었던가. 그래서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 지불생무명지초(地不生無名之草)란 옛말도 있잖은가.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제거하여 말끔히 하는 것만이 치도(治道)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돌냉이로 담근 청정 자연 식품인 돌냉이 김치의 시큰한 맛을 느낀다. 잡초의 그 질긴 맛을 다시 한 번 음미한다. [위의 글은 1986 년 봄에 쓴 것임] 202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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