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봄의 전설/ 찌깨벌레, 칠기, 문디이, 땡피

청솔고개 2020. 4. 26. 20:00

봄의 전설

 

                                                                            청솔고개

 

   먼 훗날 내가 들은 내 동생 실종의 전말에서, '아! 나비도 쫓고 나도 쫓던 그 큰머슴 아재의 참꽃방맹이의 추억담'은 이렇게 끝이 나고는, 또 다른 우리들의 봄의 전설이 이어진다.

   숨메산에 뻐꾸기 울음이 제법 깊어지면 보리가 다 자라고 이삭이 팬다. 우리 악동들은 이때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이 산에 들어가서 오래된 참나무 밑 둥이 썩어서 흙 거름처럼 된 곳은 모두 뒤진다. 우리에게는 요술 같고 보석 같은 전설의 장난감, ⁰찌깨벌레 수색 체포 작전 수행하기 위해서다. 검고 윤이 나는 그놈들의 입아귀를 보고 딱 벌어져 찌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 혹은 사슴의 뿔처럼 억센 가지가 벌었다고 해서 사슴벌레라고 하기도. 그 큰 놈들 중에 혹 새끼 딸린 한 식구라도 발견하면 횡재한 셈. 이놈들을 체포해서 학교에 가져간다. 동무들에게 의기양양 자랑하고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 싸움도 곧잘 붙인다.

   때로는 떼 지어 곡괭이를 들고, 숨메산에 숨어 들어가서 ¹칠기뿔갱이를 캔다. 낮엔 어른들이 말리기 때문에 눈이 무서워 들어가지 못하고, 어둑어둑 해지면 입산. 여기저기서 곡괭이질을 해대는데, 곡괭이 날에 부딪친 돌에 섬광이 번쩍번쩍. 제법 굵은 뿌리가 턱 걸리는 감이 온다. 낫으로 베기도 하고 잡아 뜯기도 하면서 바로 한입씩 베 문다. 흙이 버썩버썩, 칡 맛인지 흙 맛인지 모르겠다. 이래서 긴긴 봄날은 저물어 간다.

   보리밭이 우거지면 ²문디이 이야기가 떠돈다. “어른 문디이가 지 병 고치려고 어린아이들을 호려다가 아무도 모르는 보리밭에 처박아 넣고 다섯 손가락 손마디 다 문드러진 손바닥으로 마구 간질이고 기절시켜 아이들의 생간을 내 먹는다. 이때의 문디이 퇴치법은 문디이가 다가오면 도망치다가 되돌아서서 갑자기 굵은 왕 ³몰개 한 줌을 그 얼굴에다 던지면 된다. 그 얼굴이 짓물러 있기 때문에 왕 몰개 알들이 그대로 박혀버리고 문디이는 그대로 달아난다.” 더라. 대체로 이런 식이다. 정말 그런 걸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보았다는 아이는 하나 없지만, 어쩐지 봄이 깊어지면 이런 이야기들이 역병처럼 떠도는 것이다.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떠도는 미친 개 소문처럼 스멀스멀 우리들을 공포 분위기에 빠뜨리는 거다.

   요즘 가끔, 육모초나 개쑥이 자부룩한 밭둑 옆 보리밭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최근 우리나라 어디서 열리고 있는 ‘청보리밭축제’라는 축제 소식을 들으면 그런 것도 축제 거리냐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자란 마을과 학교는 지척(咫尺)이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는 꽤 멀어 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마을 또래 친구들 중에 누가 땡피에 쏘여서 퉁퉁 부어 왔었다. 우리들은 금시 의기투합, 누가 앞장서라고 할 것도 없이 복수를 위한 벌집 소탕 작전 계획을 세운다.

   날짜는 다가오는 그믐밤, 공격 수단은 화공(火攻), 이를 위한 준비물은 마른 소똥더미, 몇 무더기 짚 풀, 약간의 왜지름, 다황, 역공 방어용 돌가루포대기나 비료포대기 등이다. 투입요원은 엄선된 특공대 5명. 소탕 방식은 일제 돌격 앞으로, 공격 목표는 우리들의 주 통학로인 학교 산 옆길의 생이집이 있는  둔덕 밑 땡피 굴, 현재 사전 답사 및 상황 파악 결과, 제법 많은 숫자의 땡피 목격, 이상!

   그날, 그믐밤 야음을 탄 복수 소탕전은 성공적이었다. 벌이 옷 속으로 타고 기어든다고 팬티만 입고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진격. 전광석화의 화공전.

   지금도 그날의 무용담은 고향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자꾸 부풀려져서 오늘까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 전사처럼 비장미가 넘친다. 아무도 그 과장된을 비장미 떨어냄을 제어하지는 못하였다.

   요즘은 땅벌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119요원을 부른다고 한다. 그런 거 부탁하려고 그 바쁜 사람들을 굳이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격세지감을 금하지 못하겠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에서 ‘우리 문둥이끼리 반’ 가워,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고 ‘먼 전라도 길’에서 울음 토하는 ‘하운’님,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서는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운’ ‘문둥이’의 천명(天命)을 고축(告祝)하는 ‘미당’님과 더불어 우리들의 이야기도 이제 ‘봄의 전설’이 되어 가나 보다.  2020. 4. 26.

[주(注)]

⁰찌깨벌레 : '집게벌레'의 토박이 말, 다른 이름으로 사슴벌레, 왕사슴벌레, 넓적사슴벌레, 딱정벌레 등이 있음.

¹칠기뿔갱이 : '칡뿌리'의 토박이 말

²문디이 : '문둥이'의 토박이 말

³몰개 : '모래'의 토박이 말

육모초 : ‘익모초’의 토박이 말

땡피 : '땅벌'의 토박이 말

왜지름 : '석유'의 토박이 말

다황 : '성냥'의 토박이 말

돌가루포대기 : ‘시멘트포대기’의 토박이 말

생이집 : '상엿집'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