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길 위의 가을날들 2/~영양 봉화 옛길, 강릉, 진고개, 구룡령, 월정사, 정선, 동강, 민둥산, 단양~가을 비 찬비에 목욕을 한 듯한 피부가 매끈하고 고운 자작나무 자태

청솔고개 2020. 10. 30. 04:26

길 위의 가을날들 2/진고개, 구룡령, 민둥산

                                                                                            청솔고개

 

   모처럼 동행과의 가을 여행이 비에 젖을 것 같다. 동행은 지레 겁을 먹고 그냥 가지 말자 한다. 동행의 소심함이 또 나타난다. 나는 소신껏 밀어붙였다.

   10시 36분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동행에게 나는 “이제 정말 내가 퇴임한 걸 실감할 것 같다. 왜냐하면 모두들 근무한다고 바삐 설치는 월요일 이렇게 느긋하게 가을 여행을 떠날 수 있음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당신이 한 달 반 알바 일을 끝내고 가는 거라 더욱 뜻 깊다.”고. 환상의 가을 길의 경로를 다음과 같이 잡아본다. 기계, 죽장, 도평, 진보, 영양, 영양 봉화 옛길(주곡, 청기 옆 길, 행화, 재산, 청량산 옆길, 임기) 현동, 청옥산 자연 휴양림 옆 길, 철암, 통리, 심포, 도계, 동해, 강릉 경로였다.

   정말 우리 생애에 잊지 못할 가을 여행이다. 감동이 가득 넘친다. 강릉 중앙시장에 가서 내일 먹을 간단한 약밥과 떡을 샀다. 꼭 7년 전 설악산 공룡능선 갈 때 들렀던 기억이 난다. 그 땐 오후 5시까지 희운각 산장에 도착해야 했기에 점심 때 쯤 여기서 다음 날 먹을 음식을 샀던 기억이 난다. 홈플러스에 가서 빵과 음료를 사서 경포대로 향했다. 6시 좀 지났는데 깜깜하다. 경포 호수도 깜깜하여 먼 건물의 불빛에만 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바닷가 에 위치한 ㅅ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해변으로 나갔다. 마치 경기장 야간라이트처럼 백사장을 비추는 조명탑으로 해변은 환하다. 멀리 오리섬인가도 보인다. 작업하던 배 한 척이 이쪽으로 오다가 다시 멀어진다. 우리는 마치 해운대 신혼여행 갔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 같이 해변을 거닌다. 그네도 타면서 1972년 유신 선포 시절 그 당시 친구 ㅅ와 함께 설악산 행 시절의 이야기를 동행한테 이야기해 주었다. 아, 다시 올 수 없는 순수의 시절. 내 혈혈단신은 정말 시련도 많았고 고난도 있었다. 자꾸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이어서 경포대로 갔다. 조명을 해 놓아서 멀리서라도 훤히 보인다. 우리 둘밖에 없다. 정말 호젓한 한 때를 보냈다.

   숙소에 와서 같이 맥주와 소주 같이 타서 마시며 오늘의 여행을 자축했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의 밤은 깊어 간다. 숙소 창밖으로 희미하게 바다가 보이고 파도소리와 비바람 소리가 섞여서 들린다. [20141020.월. 비]

   밤새 가을비가 내린다. ㅅ 모텔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이름의 객사에서 맞이하는 가을비와 바람은 더욱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바로 옆 경포앞 바다의 파도 소리 때문에만 잠을 설친 건 아닐 터. 내 펄펄 끓던 청춘 시절, 여기 해수욕장 백사장 기념품가게 아가씨가 이뻐서 두근거리던 마음으로 수줍어하던 그 때 때문만도 아닌 것일 것이다. 판매원, 그 아가씨도 이제 많이 나이를 먹었을 거다. 그 때도 이렇게 날이 궂었었지. 비바람이 흩뿌리고 오리바위는 해무에 흐려져 보였었지. 새벽까지 티브이 채널을 돌리면서 잠을 들지 못했다.

   아침에 느긋하게 여유 부리면서 일어나서 떡과 빵, 커피로 대신했다. 11시에 출발했다. 둘째 날 여행 출발이다. 여행의 출발은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런데 비바람이 심하다. 출발 시, 차 운행 기록을 보니 330km. 어지간히 달렸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러 일부러 국도로 달린 것이다. 내비게이션대로 하니 대관령 지나는 영동고속도로 되기에 다시 수정해서 주문진 못미처 연곡에서 왼쪽으로 돌아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코스를 정했다. 호젓한 옛 국도로 가야 가을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빗속에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그 얼굴을 산모퉁이마다 해맑게 씻고서 나를 반겼다가 다시 배웅한다. 찬비에 젖은 그 손길들이 애처롭기도 하여 꼭 쥐어주고 싶다. 성질 급한 동행도 이번에는 묵묵히 따라주었다. 동행의 나에게 대한 신뢰가 더욱 나를 고무시킨다.  굽이굽이 국도로 가다가 소금강산 주차장에 잠깐 들러서 볼일을 보고 다시 나왔다. 여기서도 세찬 비바람에 더욱 해맑고 밝은 모습을 띤 온갖 가을 얼굴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돌아서면 다시 한 편의 스크린 화면처럼 다시 나타나는 국토 산하의 화려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낸다. 700, 800, 900m씩 높아지는 도로 표지판이 고원지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쯤 되니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속 2,30km로 점멸등을 켜고 서행한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고산의 단풍의 맨얼굴은 더욱 아름답다. 그냥 울고 싶은 감동이 내 몸을 감싼다. 동행도 옆에서 연신 감탄사를 연호한다. 이걸 어떻게 영상으로 다시 재현하고 싶은데 내겐 그런 재주 없음이 참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렇게 한 30분 오르니 이윽고 내리막, 점점 안개가 옅어지는 게 긴장이 좀 풀린다. 이번에는 고원지대만큼 벌써 낙엽송이 단풍이 다 들었다. 참 이국적이고 환상적이다. 내리막에 잠시 차를 세워 빗속에 씻겨 맑게 세수한 낙엽송 숲들의 해밝은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떠났다.

   좀 전에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애를 먹었던 고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결국 이 고개가 진고개, 구룡령임을 확인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와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윽고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 도착했다. 점심은 차 안에서 어제 준비한 떡과 커피, 차로 해결했다. 주저하는 동행을 설득해서 주차비와 입장료 11,000원 주고 들어갔다. 몇 년 전에 왔다가 정상 비로봉만 밟고 찬비에 혼이 나서 절에 들리지도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경내에 들어가서 참배했다. 동행이 뭘 기원한지는 내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중에 월정사 들어가는 전나무 길을 왕복했다. 기품 있고 아름답고 기름진 전나무가 길 양옆으로 도열하고 있다. 마음이 저절로 편해지고 자꾸만 걷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여되지 않아 아쉽다. 몇 년 전에 동행과 이곳을 처음 왔을 때 이 길을 걷지 못해서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 그 원(願)을 풀어서 참 기분이 좋다. 내 무리한 주문에 동행이 처음엔 약간 쌜쭉했지만 잘 참아 주었다. 가슴에 맺힌 모든 게 씻어 내리는 것 같다. 옆 계곡도, 군데군데마다 물이 콸콸 참 시원스럽다. 이쁜 가을 잎들도 동동 떠 있다.

   오후 3시 30분 지나 월정사와 이별하고 6번 도로로 해서 정선으로 내려왔다. 돌아가는 길마다 가을의 절정이다. 그냥 곱다, 아름답다 말하기에는 정말 아까운 풍광이다. 우중에 정선 5일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ㄷ식당에서 동행이 먹고 싶어 했던 곤드레 비빔밥, 황태찜을 시켜서 아우라지 막걸리 한 병과 같이 만찬을 즐겼다. 요즘 늘 속이 쓰린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게 다소 마음이 무겁지만 동행과 같이 건배했다. 숙소도 ㄷ모텔로 잡았다. 들어오자 말자 술이 과해서 그냥 두 시간 정도 잠들어버렸다. 비는 계속 내린다.

   또 다시 치통처럼 밀려오는 마음의 아픔. 이와 평생 동반해야 하는 나의 딱한 처지. [20141021.화. 비]

   오전에 느지막하게 일어나 바로 앞에 있는 정선 오일장을 들렀다. 10시 50분쯤 되었다. 근 한 시간 동안 이것저것 사면서 12시 쯤 아침 겸 점심으로 시장 안 식당에 들러 메밀전병도 먹었다.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이어서 근처에 있는 스카이워크 전망대를 찾았다. 동강의 한 부분이 한반도의 지형을 만들고 있었다. 단풍이 제법 물들었다. 바람이 스산하고 날이 제법 춥다. 옆길을 통해 좀 더 가보고 싶었지만 동행은 벌써 지루하고 지친 기색이다. 욕심을 죽여야 오래 갈 수 있는 법.

   오후엔 근처에 있는 민둥산을 올랐다. 길이 질어서 걸어가는데 참 애먹었다. 동행 더 힘들어 한다. 이런 미끄러운 길을 걸으니 고향 외말 마을이 생각난다. 진창을 피해 동행은 비닐하우스 복판을 힘겹게 오르내린다. 오르내리면서 가을 비 찬비에 목욕을 한 듯한 피부가 매끈하고 고운 자작나무 자태가 참하다. 흰 피부에 모락모락 김이라도 솟아오르는 것 같다. 처녀 피부 같은 매력이다. ‘자작’이라니 무슨 귀족의 명칭 같기도 하다. 몇 장이라도 찍고 싶다. 3시 20분 쯤, 정상에 오르니 안개 때문에 춥고 음습하다. 1,119m 높이라 기억하기도 좋다. 동행은 내내 질다고 질겁한다. 3시간 정도 산행했다. 고랭지 채소밭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국적인 풍정이다. 하산하니 오후 5시가 되었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하니 자꾸 뒤돌아 보인다. 5시 17분에 떠났다.

   일로 남으로, 남으로 해서 단양까지 내려왔다. 기름도 넣을 겸 나들목을 빠져 나와서 다슬기국을 시켜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무는 거다. 우리의 여정도 여기서 멈춘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밤길 운행은 좀 힘들고 지루하다. 9시 가까이 늦게 귀가했다. 499.4km 운행기록이다. [2014. 10. 22. 수. 흐림]

                                                                  2020.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