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가을날들 1/ 새제, 회룡포
청솔고개
엊저녁부터 비가 흩뿌리는 것 같더니 결국 아침에 좀 세차게 비가 내린다. ‘가을비 우산 속’이라는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 비 뿌리는 한가을에 여행길 떠나니 마음이 좀 설레는 것 같다. 그것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내 유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공간으로의 시간 여행이다. 그 곳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건 참 행복하고 뜻있는 일일 것 같다. 정신의 추억여행이랄까. 가을은 짙어가고 흐릿한 운무와 빗소리를 즐기면서 북으로 향하는 여행 길, 동행도 모처럼의 여행길에 한껏 달뜬 모습이다. 칠곡 휴게소에 잠시 서서 동행과 함께 커피 한 잔 했다. 내 취향에 맞는 가요곡도 또 들린다. 당장 시디를 샀다. 1만2천원, 신유의 ‘꽃물’ 송봉수의 ‘할미꽃 사연’ 양나미의 ‘목계나루’ 등이 좋다. 서정적이고 심금을 후비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이 음악 몇 곡으로 더욱 멋지고 정취에 넘칠 것 같다.
숙소 ‘ㅅ 펜션’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ㅂ 내외, ㅇ 내외는 벌써 와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돼지고기 숯불구이로 맛나게 점심하고 반주 한 잔도 하고 우중의 사과축제의 분위기도 느껴보았다. 나의 다리 저림 현상도 좀 완화되는 것 같았다. 은행잎과 단풍나무, 느티나무의 잎이 곱게 물들었다. 모두 샛노랗고, 새빨갛다. 빗속의 단풍 색깔은 더욱 고즈넉하고 운치 있어 보인다. 지난 해 봄, 올해 봄, 또 이 가을, 자주 이 문경 새재를 들렀다. 그 옛날 한양 가는 선비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모두 흥성거리는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게 다소 안타까웠지만 이 역시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민초들의 모습 아닌가. 사극 촬영세트장, 일지매 산채 모형 등을 둘러보았다.
친구들과는 많은 이야기 주고받았다. 주로 명리학, 그리고 건강, 살아가는 이야기로, 막걸리와 소주 한 잔씩 해가면서. 12시 지나서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가을비가 추적추적 객사(客舍)를 적신다. 지금은 새재의 가을밤이다.
오늘 여기 오느라고 대학 같은 과 친구 ㅊ의 딸 혼사에 못 갔다. 이번이 막내딸 시집 보내니 한층 더 섭섭할 텐데 가보았으면 좋으련만. 선약 때문에, 미안하다. [2012. 10. 27. 토. 비]
날이 갰다. 먼 산, 가까운 산의 단풍이 더욱 아름답다. ㅂ 내외는 근무로 좀 일찍 출발하고 ㅇ 내외와 우리는 느지막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2시쯤 헤어져서 고향으로 출발했다. 귀로는 북부지역의 속속들이 단풍 구경하기 위해서 일부로 예천-안동으로 잇는 국도로 올렸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아름다운 전원풍정, 이제 막 잎이 떨어지려고 하는 키 큰 미루나무 숲 속살을 자랑하는 자작나무 숲, 불타는 단풍나무 그루. 아아! 눈 속에 이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담아야지 하는 생각이 절실하다.
예천 회룡포를 찾았다. 사진에서 그 멋진 풍경을 몇 번이나 보았었는데 이제 정말 그 장소를 찾게 되다니, 여행은 이렇게 해서 예기치 않는 선물 같은 것 아닌가. 뜻밖의 기분 좋은 선물. 회룡포 전망대에 오르니 낙동강과 그 모래사장이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이 선계(仙界)를 방불(彷佛)케 한다. 동행더러 포즈 취하라 하고 몇 장 멋지게 남기고 나도 그 자리에 서서 이 황홀한 가을 오후를 만끽했다. 아래 주차장을 덮고 있는 샛노란 은행잎, 역광의 광휘로 부서진다.
안동-길안-죽장 방향으로 해서 길 위의 가을날을 떠나 보낸다.
이르는 곳마다 문득 몇 년 전 ‘가을로’ 제목의 영상미 좋은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름도 없는 작은 휴게소는 응달에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길가 이어진 사과 밭에 달린 탐스러운 사과 알알, 좌판에 놓고 있는 생활의 때, 사과 무더기, 감 무더기를 지키는 농부의 손마디기 무척 거칠어 보였다. 문득 동행과 나는 지난여름 고추와 참깨 농사에 힘들었던 기억이 솟구쳐 그냥 지나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사과도 사고, 감도 샀다. [2012. 10. 28. 일. 맑음]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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