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가을날들 5/장흥, 정남진, 섬진강
청솔고개
새벽 5시 좀 지나 일어나서 장 흥행 준비를 했다. 아내는 역시 들뜬 기분이다. 7시 4분에 출발했다. 여행 날씨로는 정말 좋았다. 역시 옅은 가을 안개가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지난 토요일에 이어 5일 만에 다시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다. 가을은 이렇게 여행의 철인가 보다.
함안 휴게소를 지나면서 그 동안 못 나눈 많은 이야기들을 또 나눈다. 이게 여행의 진정한 묘미일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남양산 분기점-남해고속도로-순천목포고속도로-장흥나들목-23호국도 경유해서 장흥읍내 식당에 도착하니 12시 15분, 5시간도 더 걸렸다. 내비게이션 상에는 3시간 40분쯤 계산되던데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더 소요된 셈이다. 거리는 312.4km. 1박 2일 팀이 다녀가 더 유명해졌다는 ‘ㅁ네 식당’에 가서 옆 축협 직판장에서 사간 갈비살, 차돌박이 살과 장흥 삼합(소고기, 표고버섯, 키조개 관자살) 4만여 원어치 둘이 먹으니 적당하다.
정남진 가는 장흥 땅은 가을이 가득 내렸다. 은행잎도 샛노랗다. 남도의 가을 풍광이 좀은 쓸쓸하다. 어떤 한(恨)이라도 어린 것 같다. 아마 이 땅을 배경으로 그들의 정서를 풀어낸 많은 예인 문인들에 대한 내 잠재된 기억 때문일 것 같다. 천관산 등산을 생각하고 입구 주차장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입구 길은 키 큰 억새를 심어서 역광에 반짝이는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천관산 능선의 바위들이 멀리서도 마치 이빨 빠진 톱날처럼 보인다. 역시 역광이라 윤곽만 더듬을 뿐이다. 오르고 싶은 마음은 많았으나 내 하초 사정과 하루 일정으로는 무리라고 생각된다. 너무 마음도 바쁘고 몸도 바쁜 것 같아서 고단함을 피하기 위함이다. 정남진은 그냥 인공적인 조형물 치레다. 그래도 다만 멀리 멀리 남녘 바다는 섬들의 파노라마다.
오늘은 짙은 가을 바다 안개로 시야가 몽롱하다. 2,000원짜리 전망대 입장료를 반값으로 깎아주는 관리인의 센스가 오히려 돋보인다.
돌아오는 길도 어떤 정한에 어리어 주체할 수 없는 남도길 특유의 아련함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문득 아까 봤던 천관산문학관을 가보고 싶었지만 아내의 다그침으로 그냥 두고 떠났다. 이렇게 뭐라도 하나 미련을 남기고 가야 다음 다시 한 번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다시 와서 천관산도, 그 문학관도 다시 보는 거다. 이청준, 서편제 등 남도 문학의 그 한풀이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내내 마음이 애린다. 해지는 장흥들녘이 내 눈과 뇌리에 내내 밟힌다. 오늘의 이 정감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 놓다.
귀로는 피곤하다. 그러나 음악이 있고 커피가 있어서 잘 견딜 수 있었다. 섬진강 휴게소에 들러서 사고디 한 사발 5천원어치 사고 커피 한 잔 하고 또 귀로를 재촉했다.
[2013. 11. 7. 목. 맑고 옅은 안개 낌]
202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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