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홋카이도의 늦가을 자작나무 숲길, 첫날(2/2)/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달을 뒤로 하면서 드넓은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정신없이 또다시

청솔고개 2020. 11. 13. 23:21

 

홋카이도의 늦가을 자작나무 숲길, 첫날(2/2)

                                                          청솔고개

   우리는 앞뒤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자리 옆, 창 쪽에 앉은 사람은 일본인 남자다. 나는 내리는 정류장이 어디쯤 되는지 잘 모를 것 같아서 불안하다. 긴장된 다. 용기 내어 말을 터놓는 것이 좋을 듯해서 “스미마셍”하고 말을 걸었다. 친절하게 응대해 준다. 내가 서툰 일본어로 “나카지마고~엥에끼 호~꼬~?”(나카지마 역 방향?)라고 말을 걸었더니, “하이!”하고 고개를 까딱하면서 뭐라고 말해준다. 내가 일본어를 잘 못 알아들은 것을 알았는지 영어로 말해준다. 나도 적절히 응대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을 열어서 가리키면서 내 보고 “피브티미니츠”라고 한다. 열심히 뭐라고 설명한다. 나도 영어로 알아듣는 척하면서 대꾸한다. 정말 친절하다. 내가 “아이 비짓 퍼스트 인 삿포로”하니까, “오, 예스”한다.

   아까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재일 동포 ***씨가 내리면서 우리보고 아는 체한다. 먼저 내린다는 인사한다. 우리도 밝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목례로 인사한다. 가장 감동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날씨가 흐려져서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우리 마음은 밝아진다. 우리 호텔 비스타나카지마고헨이 걸어서 3분밖에 안 걸린다고 설명이 돼 있는 나카지마고헨역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버스정류장을 ‘바스떼~’라는 걸 확인해서 몇 차례 물어 보았는지 모른다. 다시 지나가는 사람한테 지도를 펼쳐서 가리키면서 두세 번 “나카지마고~엥에끼 호~꼬~?”를 연발했다. 행인이 일본어로 뭐라 뭐라 했지만 그냥 알아들은 체하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소변이 너무 급해 감당이 안 된다. 이거야 말로 위급상황이다. 호텔은 바로 앞에 보이는데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곧 쏟아질 것만 같고, 엉거주춤 하니 아내는 우습다는 듯이 놀린다. 그런 아내가 얄밉기 보다는 귀엽다.

   드디어 호텔 찾기 성공.

   비즈니스 비스타 삿포로 나카지마 공원[VISTA SAPPORO NAKAJIMAKOHEN(札幌 中島公園)]이란 긴 이름의 호텔이다. 다른 곳에도 자주 붙어 있는 ‘VISTA’의 뜻을 찾아보니 ‘(아름다운) 경치, 풍경, [명사] 전망, 앞날’로 되어 있다. ‘札幌’(삿포로)의 한자 뜻은 札(찰)은 ‘얇은 조각이나 편지, 공문서’, 幌(황)은 ‘휘장, 포장, 덮개, 술집에 세운 기’로 풀이 되어 있다.

   로비에서 직원들이 상냥하게 맞이한다. “아이 리저브드 바이 **투어”라고 하니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정식 표현은 ‘아이 해브 어 레저베이션 훠 투 나잇츠(I have reservation for two nights.)이라고 돼 있는 걸 확인했다. 체크인 과정을 잘 수행하고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전자키를 대니 비로소 작동한다. 참 보안이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은 자그마하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바로 짐을 정리하고 좀 쉬었다가 삿포로 시내 명소를 보러 나갔다. 날은 좀 흐렸지만 푸근했다. 이제부터 명실 공히 자유인, 자연인으로서 해외 자유여행의 첫발을 뗀다.

   먼저 선술집, 바 등 다양한 가게가 모여 있는 삿포로 북쪽 환락가로 5천여 개의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고 안내되어 있는 스스키노를 찾았다. 그런데 그 거리가 그 거리 같고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서 무작정 걸었다.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확인해 보아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진과 익숙해진 듯한 거리가 보인다. 다누키코지[狸小路] 거리다. 아내가 너구리 그림을 본 적이 있다면서 아는 체한다. 이번 여행에서 아내의 적응력과 순발력이 곳곳에서 발휘된다. 나는 생각이 많아서 판단이 느려지는데 아내는 그 반대다. 다누키코지[狸小路]. 가이드북에는 7개의 블록에 향토음식점이나 다양한 2백여 개의 숍이 모여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좀 돌아다니다가 한 라멘 집으로 들어갔다. ‘면옥설풍[麵屋雪風]’이라 간판이 붙어 있었다. 라멘 한 그릇과 아내가 좋아하는 군만두 2인분, 삿포로 클래식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듣던 대로 비쌌다. 모두 합쳐서 우리 돈 2만원이 넘었다. 군만두는 맛이 좋았는데 라멘은 무슨 육수를 썼는지 무척 짰고 비위에도 맞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이국적인 분위기에 흠씬 젖어본다. 그 동안 우리가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면서.

   근 10여 년 전에 읽은 <부부끼리 떠나는 50코스별 배낭여행>을 탐독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이런 날을 꿈꿨는데 이제 이 순간부터 시작된 거라고 생각하니 짙은 감동이 밀려온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에서 부부 둘이 손잡고 지도를 펼쳐가면서 여행지를 찾아다니는 당신의 모습”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나를 매료시켰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일본의 북국, 홋카이도 삿포로 거리에서 그 꿈을 막 이루기 시작한 거다. 우리는 이런 낯선 거리 밤길을 걸으면서 자유로움과 호젓함과 우리만의 비밀스러움을 즐기는 것이다.

   걷고 또 걷다보니 멀리 조명이 휘황찬란한 탑이 보인다. 가이드북에서 몇 번 본 거다. 삿포로TV탑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거닐고 있는 곳은 오오도리 공원이다. 늦가을 밤이 되어서 나무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으니 광장인지 거리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공원을 지나서 더 가까이 가보자고 했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멈칫거리는 아내를 독려해서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입장료가 생각보다는 덜 비쌌다. 1인당 720엔이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오르는데 기대 이상의 야경이다. 환상적이었다. 아내도 만족하는 듯하였다. 일본말로 그야말로 “스고이!”였다. 사진도 찍고 넋을 잃고 양 사방을 바라다보았다. 특히 남북과 동서를 관통하는 메인스트리트의 야경이 마치 찬란한 보석처럼, 현란한 섬광처럼 느껴졌다.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달을 뒤로 하면서 드넓은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정신없이 또다시 걷고 걸어서 호텔까지 왔다. 제대로 첫날 신고식을 한 거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서 나카지마고헨 지하철역에 잠시 들러 보았다. 1일 자유이용권 같은 걸 끊어 놓으면 절약된다는 가이드북 안내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꿔서 내일 것은 내일 다시 처리하자고 생각을 모았다. 매점에 팔고 있는 ‘찹쌀모찌’와 귤 한 봉지를 아내가 산다. 일본 ‘찹쌀모찌’를 꼭 맛보고 싶다고 하면서. 모찌 한 개에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 크게 비싼 값은 아니었다. 호텔에 와서 맛보니 통팥이 굵게 씹힌다. 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국 낯선 곳에서, 자연인, 자유인의 자유여행 첫날밤은 깊어 간다.

   내일부터의 코스. 종일, 시 외곽지역으로 여행을 꿈꿔보면서 이동 수단을 렌터카, 아니면 JR표 등을 생각해 보았다. 이번은 절대 욕심 내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하면서 소박한 근교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좌측통행 자동차 운행방식도 낯설었고 또 모레는 노보리베츠로 이동해야 하니 이런 조건에서는 암만 생각해도 마땅한 코스가 안 잡힌다.

   처음 생각했던 오비히로 행, 후라노, 비에이 행, 영화 ‘鐵道員’의 배경인 이쿠도라 역은 다음으로 기약하는 게 옳다는 판단을 굳혔다. 첫 자유 여행에 너무 욕심내어 무리하면 아내가 처음부터 싫증을 낼 수 있다. 이 점은 오히려 역효과라는 판단을 중시했다. [2014. 11. 10. 월. 흐림]  2020.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