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Atlantis Sheraton Hotel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했다. 이어서 반 호프 거리를 돌아보았다. 먼저 페스탈로치 동상을 찾았다. 어린 아이를 붙잡아 다정한 눈길로 보살펴주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진 청동상이다. 아래에는 큼직한 글씨로 ‘JOH-HEINRICH PESTALOZZI 1746-1827' 이렇게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전설 같이 전해지던 인류 스승의 사표는 그렇게 서 있었다. 특히 나의 ‘국민학교’ 당시 국어교과서에 소개된 그의 일화 중 하나, 맨발로 노는 아이들이 찔릴까 봐 유리조각을 말없이 줍던 그의 모습과 겹쳐지는 이 동상의 모습은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흰 눈을 이고 있는 스위스 산봉우리들이 마침 갠 햇빛에 영롱히 빛나고 끝없이 이어진 황갈색도 선명한 낙엽송림, 그리고 진초록의 침엽수림대 사이에는 언뜻언뜻 보이는 새하얀 교회 건물, 어쩐지 익숙해져 보이는 키 큰 미루나무 숲, 목장 터의 초지 등 늘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완연한 스위스 산록들의 만추 정경에 이 나그네, 푹 빠져든다. 버스로 알프스 산록을 타고 스위스 , 이탈리아 국경을 넘는다. 비가 와서 우산 쓰고 이동했다. 우리는 북이탈리아 밀라노로 간다. 좁은 산길을 달리면서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은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평지나 골짜기로 내려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크고 작은 호수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런 깊은 산록에 청청하기 그지없는 천연 호면에도 늦가을 양광이 부서진다. 천연호수 대안(對岸)에는 아담한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천혜의 자연 조건이라 할까, 아니면 산투성이인 악조건을 멋지게 극복했다고 해야 할까? 군데군데 지난 가을까지 목장 터의 모습이 여행 사진엽서에서 많이 보던 풍경이라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14:30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밀라노’란 의미는 ‘평야에서 자리 잡은 곳’. 이곳 북부 이탈리아사람들의 성향은 보수적이고 근면하며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대체로 남부 사람들보다 키가 작은 종족이 분포하고 있고 일찍이 산업 기반 시설을 두로 갖추어서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부유한 곳이다. 그 중심인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대표도시. 이탈리아 중에서도 가장 세련되고 힘 있는 패션의 원조도시다. 시내를 둘러보니 명품 의류, 가죽제품 등을 판매하는 매장이 무척 고급스러웠고 세련되어 보였다. 백화점엔 외국인들이 붐볐다. 이곳에서 쇼핑은 주로 전문점 위주로 이루어진다. 고객들도 수 백 년 동안 내려오는 대를 이은 전문점의 명품을 찾는다. 한 가게에 전문 생산품 한 가지만 대를 이어 취급한다. 문득 대구시의 밀라노프로젝트란 말이 떠오른다. 섬유, 가죽, 패션의 세계적인 명품 못지않게 이탈리아 산(産) 포도주(wine)도 프랑스만큼 유명하다. 특히 포도가 맛있었던 해에 생산된 것으로 담갔거나 명품(名品) 명산(名産)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냐에 따라 그 가격이 정해진다. 와인을 비롯한 모든 주류들은 이들에게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한 소화제 역할로 삼는 것이 그들이 즐기는 문화의 속성이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명품은 피아트, 페라리 등이다. 대체로 규정 속도를 위반하는 것은 자연스럽단다. 이점에서도 우리와 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면세 매장에는 이탈리아명품 선글라스가 유명한데 고유번호가 일일이 새겨져 있어서 진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면세점에서는 구치 명품은 판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반 매장의 장난감 중 8할은 중국 것이라고 했다. 거리의 차들이 마치 소인국 장난감처럼 작고 앙증맞아 보이는 것이 특이하였다. 담배꽁초나 휴지가 많이 널려 있었다. 밀라노라 시내에 있는 두오모 성당, 셈피오네 공원, 라스칼라 좌(座) 등 명소를 찾았다. 이탈리아는 석조건축의 메카 같다. 곳곳이 고색 찬연한 성벽, 성당 등 각종 석조 건축물이 눈을 현란하게 한다. 그런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서는 밀라노는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명성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궁금하다.
칼스바트, 볼차노, 트렌토,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베니치아, 페라라, 블로냐, 피렌체, 아레초, 페루자, 폴리뇨, 로마, 나폴리, 베수비오산, 폼페이, 카프리섬,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사라쿠사, 카타니아, 메시나, 폼페이, 로마 등이 괴테의 주된 이탈리아 기행의 여정(旅程)이다.
내 여행길도 당시 괴테와 견주어 가면서 이 천재와 동행해 볼 수 있을까. 위에 나오는 낯선 지명에 대한 기록이 아래에 간단히 나타나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다.
아래 [ ]안은 괴테의 기록이다.
[9월 7일 미텐발트, 나의 수호신이 내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수호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9월 11일 트렌토, 많은 상인들의 얼굴이 나까지 덩달아 기쁘게 해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의도적으로 유쾌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
9월 11일, 술집 주인도 독일어를 전혀 못하니 이제는 내 언어적 재능을 시험해봐야 한다. 좋아하는 언어가 생생히 살아나서 이제부터 사용어가 되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9월 14일 토르볼레,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 있는데도 세계와 그 세계의 내막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로 종종 불편하고 위험한 지경에 놓이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하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두오모 성당의 기하학적 아름다움과 그 위용은 유럽 성당 건축물의 표본이다. 두오모란 이름의 건물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두오모’란 ‘돔’이란 뜻의 이탈리아 용어다. 모든 ‘돔’식 성당건물을 이렇게 일컫는다. 라스칼라 좌(座)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산실답게 품위 있고 장중하다. 객석에 앉아서 보니 문득 푸치니의 가극이 들려오는 듯하다. 밀라노의 늦가을이다. 가을비는 바람에 흩뿌려지고 비에 젖은 플라타너스 잎들은 지고 있다. 가끔씩 잎들이 흩날린다. 무척 쓸쓸한 이국이다. 더욱 더 스산해지는 기분이다. 중학교 때 본 ‘탈주특급(脫走特急)’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밀라노의 가을 풍경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밀라노 중심에 내가 있다. 스위스 국경 알프스 산록을 넘어서……. 이런 식의 이국정취란 대단히 매력적이고 충동적이며 또한 병적인 중독성마저 있다. 그래서 여인의 맨살처럼 고혹(蠱惑)적이다. 너무나 즐비한 석조 건물들이 내 얕은 식견으로는 모두 비슷비슷하다. 석조 고딕식 건물, 분수, 동상 등 몇 군데를 둘러본다. 베란다마다 노란색 소국 국화 화분이 올려져있다. 꽃을 좋아하는 지중해 인들의 낭만과 정열이 아니겠는가. 저녁식사는 현지 식으로 이탈리아 대표 음식 스파게티. 어지간한 것은 다 소화해 낸다고 자신하는 나의 강한 비위도, 올리브기름에 절인 이 스파게티를 끝내 다 비울 수는 없었다. 그것도 한국인의 입맛에 상당이 맞추어 조리했다고 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비위 좋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워할 것 같은 나로서도 절반이상 남길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음식에는 강한 미(味)와 향(香)을 지니고 있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색다름’, ‘낯섦’ ‘이국적인 그 무엇’ 등을 찾아가는 활동인데, 그게 너무 심하니 정말 대책 없다. 저녁에 조명에 드러난 두오모 성당 등 거리의 인상은 또 다른 얼굴이다. 몇몇 거리 예술가들의 조각처럼 서서 꼼짝하지 않은 퍼포먼스, 거리 공연이 이채롭다. [1997.11.27.(목, 제6일/12일)] 2020.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