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그대는 순수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20대 마지막의 울분, 비애, 시대의 절망, 그리고 식을 줄 모르는 열정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청솔고개 2021. 2. 24. 01:10

그대는 순수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청솔고개

 

 

   ㅈ형!

   그냥 ‘ㅈ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ㅈ 선생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 듯 하군요.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던가요? 그래요, 77년 봄이었나 봅니다. 그때 내가 군에서 휴가를 나와서 내가 활동했던 야학을 찾았을 때, 처음 본 ㅈ형의 첫 인상은 참으로 강렬하였습니다. 순수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더욱이 ㅈ형은 같은 고향, 같은 대학,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 후배로서 초면이었지만 백년지기처럼 친근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야학을 둘러싸고 있는 들녘이 한창 피어나는 보리로 짙어지는 그 봄날의 저녁 어스름을 틈타, 골목의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요. 그때 골목에 내리 비치는 저녁햇살은 젊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파고 들었지요. 나는 육군 일등병, 사범 대학 졸업과 함께 3년간이나 몸담고 정 바쳤던 야학을 떠나 현직교사로 부임한 후 1년여 만에 군에 입대한 후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ㅈ형과 나와의 만남이 정말 운명적이었다고. ㅈ형도 알다시피 그 당시 그 야학은 사범대학을 다니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순수한 교육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매우 소중한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상실한 이 땅의 만학도들을 위해 근 30년 전에 설립된 야학에서 처음 만난 ㅈ형에게는 굳건한 동지애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나는 제대하고 경북 ㅇㅇ군 ㅇㅇ중고등학교에 복직 근무하고 있었는데, ㅈ형이 1980년 3월 정말 우연치도 않게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근 왔지요. 고향 거리에서 ㅈ형과 술을 나누면서, 그 겨울을 보내고 난 바로 뒤였습니다.

   ㅈ형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반가움과 곤혹함이 교차하더군요, 그런데 ㅈ형이 전임학교에서 1년 만에 전근하게 된 경위는 한마디로‘날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임 학교의 비리에 대항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집단행동을 유발하게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처사이지요. 이 유형지 같은 곳에서 ㅈ형과의 동행이란 참으로 기구한 일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때 우리는 함께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요. 20대 마지막의 울분, 비애, 시대의 절망, 그리고 식을 줄 모르는 열정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ㅈ형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이며, 민족(민중)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듯 하였습니다.‘역사의식’에 조금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恨)의 미학’과‘힘의 논리’의 의미도 약간은 알 듯 하였습니다.

   ㅈ형은 그때 나에게 말했지요.

   “ㅊ형, 나를 욕하지 마십시오, 외도하는 사람이라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가야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순수와 열정에 불타던 ㅈ형의 모습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던가요? ㅈ형 말대로 가치 박탈의 유년 시절, 성장기의 체험과 70년대의 시대·역사적 상황이었던가요?

   한 사람의 문학적 행위가 사회 정의와 역사 발전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 하는 문제에 귀결되겠지요. 나는 처음에는 벌써 3년 전 문단에 소설로 등단한 사람이 본다는 책이 헌법학 개론, 경제원론, 형사소송법...... 등이었을 때 당혹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는 ㅈ형이 문학에서 도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건 아니었습니다.

   ㅈ형과 한자리에 근무하고 함께 있으면서 우리는 늘 서로의 시선을 의식했지요. 힘의 획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ㅈ형의 모습이 확신에 가득 차 있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나를 안타깝게 하고 곤혹스럽게도 하였지요. ㅈ형도 자신이 내게 그런 모습 비쳐질까봐 무척 피곤해하였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마구 지껄이고 넋두리하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많이들 마셔댔지요.

   우리는 함께 노래도 불렀지요. ㅈ형의 기타반주로 나훈아의 ‘머나먼 남쪽 나라,‘고향역’등을 자주 불렀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지금도 그 때 그 곳의 생활이 너무나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북에서도 가장 깊은 오지라서 그만큼 자연의 혜택은 풍부한 곳이지요. 철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움, 일월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푸른 강물, 두메산골에는 눈 녹아 흐르던 물이 갯강아지의 눈망울을 틔우고 산복숭아꽃의 화사한 꽃그림자가 가득 찰 때, 낙엽송의 섬뜩한 아름다움을 또한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름밤의 고기잡이, 가을날의 머루 다래 따서 술 담그기, 각 동네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가재를 잡으면서 하염없이 보낸 어느 가을날.

   ㅈ형, 우리들은 그곳에서 다른 젊은 교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ㅈ형은 항상 좌중을 압도해가며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위치였습니다. ㅈ형의 날카로운 논리, 기발한 유머,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잠언, 일갈 대성하는 독설(?)이 지금도 생생이 기억납니다. 그해 여름 ㅈ형과 함께 떠난 문경새제 여행은 지금도 참담하고 뼈저린 회한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지요.

   1980년 12월, 나는 ㅈ형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의 피곤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2년간의 ㅇㅇ중고등학교 근무를 청산하기로 했습니다. 늘 가까이 하면서도 ㅈ형에게 조금도 힘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 나의 일상의 늪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더 이상 보여 주기 싫었다고나 할까요.

   1982년 12월 4일, ㅈ형은 드디어 그 학교에서 사임을 했지요. 고향 가까이로 전근 와서 결혼한 나에게 ㅈ형이 보낸 편지를 받고 알았지요.

   “현실은 관념을 배반하려 하고 관념은 현실을 극복하려 하고 이성과 감성이 모순되어 비리를 낳고 희망은 늘 새롭고 불안하게 삶을 꾸밉니다.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루지 못한 꿈들과 긴긴 역사의 피안에 묻힌 오욕과 영광들과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역동을 오래오래 되새김하여 결단했습니다. 수동에서 적극으로, 수혜에서 진취로 하늘이 주는 그릇의 크기를 담아볼 수 있을지는 ‘풀잎처럼 눕는’ 순결한 뜻에 의지 용기 노력을 합한 세월 뒤라야 알겠지요.”(82. 12. 10. 서신)

   고행을 결단하고 배수진을 친 ㅈ형의 의연한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오히려 눈물겨웠습니다.

   “그리운 ㅊ형, 관악산에 봄이 와도 함께 나눌 ‘임’이 없습니다. …책을 읽고 세월을 보냅니다. 무릇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라 그리운 정 두고도 이렇듯 ㅊ형과 난 다른 하늘 다른 시간을 보내는가 봅니다. 하지만 ‘지음(知音)’의 날들은 영원하리다.”(83. 4. 15.)

   이것은 전국을 전전하다가 서울서 보낸 편지였지요.

   “때로는 바람으로 구름으로 살고 싶습니다. 집념도 버리고 허망에 겨운 몸짓도 두고, 다만 오욕의 날들과 비리한 오늘을 좀 더 아름다운 땅으로 가꾸고 싶은 한 가닥 순결이긴 하지만 내 가는 길의 인간적 천부(淺腐)함은 늘 회의합니다. 아직은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꽃을 보고 하늘 보고 강물을 보며, 덧없는 우리 삶을 그윽이 살고픔이 이 가슴 한줄기 바람이랍니다. 어서 뿌리를 내리셔야지요. 아기가 있고 땀 흘려 울타리 지을‘집’을 가짐은 이 세상의 가장 큰 행복이라던 부랑아 문도엽의 얘기를 격려 삼으십시오. 부끄러워 마시고 떳떳이 행복을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83. 1. 19.)

   일상에 파묻혀 사는 내 자신에 대한 자괴심을 위로하려 ㅈ형이 보낸 정겨운 사연이었지요.

ㅈ형이 큰 나래를 채 펼치기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습니다. 1987년 겨울이었지요. 그러난 ㅈ형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3년의 투병 생활을 통해 증세는 점차 호전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불굴의 투혼’이랄까요. 그 해학, 기지, 달변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ㅈ형은 대변신을 하여, 그간의 체험과 한의 세월을 하나씩하나씩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지요. 멀리서라도 갈채를 보냅니다.

   ㅈ형이 내게 준 이 말, “인생은 영원한 승리도 영원한 패배도 없다. 바닷물은 해면은 고요해도 그 해심은 와류가 있다.”라는 뜻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언제 따스한 봄날에 다시 한 번 만나 좋은 날 좋은 시절 보내봅시다. 건필을 빕니다. 내내 평안하십시오. [이 글은 1991. 1. 25.에 당시 모 교육 잡지의 기획 기사‘(체험사례, 셋) 잊혀지지 않는 동료교사’로 투고한 것을 다듬어서 실은 것임.]  2021.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