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를 보내면서
청솔고개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이때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무슨 미룬 숙제라도 해 치우려는 듯이 ‘송구영신(送舊迎新), 근하신년(謹賀新年), 해피 뉴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운운(云云)’하는 세밑, 연초 인사로 서로 간에 분주하다. 나도 젊은 시절 한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도리이고 예의라는 생각을 하고 세밑 인사 치른다고 참 분주했었던 적이 있었다.
시간은 지금도 똑딱 똑딱 흘러간다. 아니 그냥 소리도 없이, 느낌도 없이 보이지 않게,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 시간이다. 어제 이 시간이나, 오늘 이 시간이나 그냥 존재하는 것임에 불과하다. 한 해라는 것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언어학 개론에 나오는 언어의 분절성(分節性) 개념을 접하고부터 알았다. 이런 모든 건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어제 자정이나 오늘, 즉 12월 31일 자정이나 똑 같은 의미를 가진 시각인 것이다. 어제 오후 5시 지나 보는 해넘이나 오늘 12월 31일 해넘이나, 오늘 12월 31일 해돋이나 내일 1월 1일 해돋이의 차이가 뭣인가. 해돋이 시간이 조금 달라지거나 아니면 오늘은 해돋이가 선명했는데 내일은 흐릴 것이다 정도이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물론 사람 사이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서로 간의 존재감 확인 차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의례는 평소에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보이는 것이다. 한해가 마무리되려고 하니 무슨 연말 정산하듯이, 아니면 빚이라도 갚듯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공식적으로 내 던지다시피 하는 치르는 것이 나는 좀 우스워 보인다.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지금 SNS 상 불특정 다수인에게 어디에선가 다운 받아온 형식, 멘트, 규격이 엇비슷한 연하엽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무슨 전단지 살포하듯이 하는 것은 더욱더 부질없어 보인다. 수취인 이름 하나 없는 현란한 그림, 영상, 음악보다는 상대방의 이름 하나라도 들어 있는 편지형식의 안부 묻는 방식이 오히려 신선하게 보인다. 누가 내게 아주 잘 만든 동영상 연하엽서를 보내서 받았다 하자. 거긴 내 이름 한 글자도 명기돼 있지 않았다. 내게 엽서를 보낸 그는 지금 SNS 발송 체제로 볼 때, 무한 복사한 그 엽서를 손끝 하나 누르거나 클릭 한 번해서 도대체 몇 장이나 살포했을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면 그 몰개성(沒個性)으로 아주 도매금(都賣金) 취급당하는 느낌도 든다.
차라리 지난 날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엽서를 오프라인으로 보낼 때가 더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거기 겉봉이나 속지에는 받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 보내는 사람의 자필 사연, 자필 서명이 한두 군데는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좀 우스운 것은, 우리는 1월에서 2월 사이에 양력의 신정, 음력의 설이라고 해서 해마다 이런 상투적인 연하엽서 발송을 두 번이나 치른다는 것이다. 양력 1월 전후 했던 인사말을 음력 1월 전후 그대로 복창하는 경우가 참 많다. 아주 오래 전에는 관 주도로 이중과세라 해서 이를 금했던 적도 있었다. 이는 꼭 지상파(地上波) 방송에서 연초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번씩 나서서 출연진들이 비슷한 한복을 입고 엇비슷한 인사말을 던지는 것과 꼭 닮은 꼴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이제 우리는 제발 세밑, 정초의 영혼 없어 보이는 이런 행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과공(過恭)은 비례(非禮), 곶감 겹말 격이다. 몇 시간만 지나면 해가 바뀌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건 시간의 연장 선상에서 존재한다. 내일도 해가 뜰 것이고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갈 것이다. 다만 새 달력 한 장이 넘겨지고 세상 모든 곳에는 이제 2021년도 신축 년 몇 월 며칠로 표기되는 것 외에는. 2020.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