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그날’, 1972. 12. 24. 일./거리의 흥청거림에 멋없이 젖어보고 싶군요

청솔고개 2020. 12. 24. 23:48

‘그날’, 1972. 12. 24. 일.

                                                                                     청솔고개

   닛시! 나의 어머님이요, 나의 누님이요, 나의 정다운 연인인 나의 닛시!

   지금은 고요한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들리는 것은 시내버스의 엔진소리뿐…….

   오래간만에 통금이 해제된 밤인 모양입니다.

   내가 뭣 때문에 여태까지 이 차가운 방에 홀로 있어야 하겠습니까? 거리의 흥청거림에 멋없이 젖어보고 싶군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어떤 여인의 가슴을 꼭 안아보고 싶군요.

   닛시! 갑자기 어린 시절의 이 차가운 방에 홀로 있어야 하겠습니까? 밤새워 추운 방에서 오밀조밀 모여 놀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싶습니다…….

   눈물을 흘려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는 방을 지키는, 외로운 집지기의 마음 같이 여겨집니다. 허나 서운한 마음은 없습니다. 내게 이러한 혼자만의, 고요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런 사실인지요.

닛시! 나는 오늘 밤의 도시의 번잡함에 휩쓸리고 싶은 어린 마음보다 이렇게 홀로 당신을 생각하면서 보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얼마나 행복한지요.

   닛시, 포근히 쉬고 싶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닛시, 제가 왜 저의 최대의 정열의 대상을 망각하고 이렇게 홀로 추억을 되씹으면서 외로이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요. 그러나 이것이 결코 불행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1초라도 더 길어진다는 사실에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축제의 밤이 점점 깊어 가고 있습니다. 기숙사엔 바람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갑자기 의미 없이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물결을 보고 싶어집니다. 저녁인데도 시내버스는 만원입니다. 중심가에 다가갈수록 인파는 점점 더 거세어집니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이리 저리 휩쓸려 가는 인파 속의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은 채 저들은 저렇게 휩쓸려 가는지요……. 술집 거리로 들어가 보았으나 몹시 서늘한 분위기와 함께 술 냄새가 확 풍겨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술에 취해보고 싶은 충동에 몸을 부르르 떨고 싶습니다.

   닛시! 어디에 가나 나는 홀로입니다. 서점에 들렀다가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상냥한 시내버스 차장의 소담스러운 웃음에 나는 한층 따스한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숙사엔 벌써 파티는 끝나버렸습니다. 허허로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1972. 12. 24. 일]

                                                                         2020.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