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그날’, 1972. 12. 16. 토./"넓은 방에 홀로 앉아 당신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이 시간만은 즐겁고 흐뭇합니다"

청솔고개 2020. 12. 16. 01:01

‘그날’, 1972. 12. 16. 토.

                                                                 청솔고개

   닛시!

   무한(無限)한 인간(人間) 행렬(行列) 중에 보잘 것 없는 나 하나, 너 하나, 그 하나. 하나하나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마치 떨어지면 구천의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지듯 하는 두려움을 갖고서. 그렇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고 흩어지면 정말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들 자신을 위해서 서로와 가까이 하고 당장 멀어지면 생명이라도 잃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보이기 위해 맹목적으로, 그들의 시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게, 보이기를 원하고 보기를 원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학기말 시험의 대부분은 끝이 났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 나니 언제나 느꼈듯이 텅 빈 마음입니다. 날씨는 포근합니다. 버스에 올라서 도회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정 들지 않는다던 도시가 이상하게 숨 가쁜 감동을 머금고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퇴색되어 회백으로 물 들린 도회는 엷은 저녁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단순한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와, 나의 마음을 울적하게 합니다. 인간의 단순하고 순수한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서 시내버스 속에 울리는 유행가 가락 또한 귀를 막을 정도로 듣기 싫은 것만은 아니더군요.

   닛시!

   넓은 방에 홀로 앉아 당신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이 시간만은 즐겁고 흐뭇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푹신한 안락의자가 아니어도 좋겠습니다. 딱딱하고 낮은 의자에서 몇 밤을 새고 낮이 흘러갈 동안 오로지 당신을 향한 긴긴 사연만을 적어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겠습니다. 흰 눈이 내리고 눈보라가 치는 밤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세상에 오직 홀로된 당신과 나……. 한 번의 몸짓, 한 번의 눈매, 음성……. 이 모든 것도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 되게 하겠습니다.

   닛시!

   내가 밤이 외롭다고 하면 너무 감상적이라고 꾸짖진 않겠지요. 오직 홀로인 나……. 외로 꼬부라진 벼랑 위의 좁은 길을 허청거리면서 한 치의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걸어가는 외로운 나입니다. 오늘 ㅂ선생님이 내 방에 들렀더군요. 조용하고 자그마한 몸짓을 하는 그미의 태도에 새삼 호감을 느꼈습니다.

   닛시!

   무엇이든 일을 해야겠습니다. 혼자 자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나만이 가질 수밖에 없는 묘한 소외감-이것을 참으로 내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보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시멘트 포도의 길을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닛시!

   제야의 종이 울릴 날도 몇 밤 남지 않았군요. 한해의 모든 일을 며칠남지 않은 이날 동안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어젯밤 꿈에 어여쁜 처녀를 만났습니다. 나의 마음은 황홀하고 설렜습니다. 그러나 지순(至純)해야 할 나의 마음에 약한 파동이 심히 일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그 처녀는 몹시 가냘픈 모습이었습니다. 등허리를 쓰다듬고 품에 안을 때 내가 느낀 짧은 행복감과 신비감은 정말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아! 女子란 이런 것일까요.

   닛시!

   내게도 사랑-목숨을 바꿀만한-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지나친 생각은 아니겠지요?                       [1972. 12. 16. 토.]

 

 

오늘부터 내가 꿈에도 그리던, 나의 임에 대한 하소하고 싶은 사연들을 적어보련다.

나의 임의 이름을 「닛시」라고 부르련다.

허기야 이름이 어쨌든, 나의 구원의 형상으로 바라던 나의임이면 된다.

그 이상 아무런 형용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나의 이름은 「수아」라고 하련다.

별다른 연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어쩐지 그 이름에 풍기는 것이 나의 모든 것을 잘 나타내 주고 내게 어쩐지 그 이름이 다정하게 들려서 그렇게 부르련다.  [1972. 10. 14. 토]

                                                                           2020.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