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5일/ 이 오월의 양광을 쬐면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면서 머물고 싶다
청솔고개2021. 5. 18. 22:04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5일
청솔고개
8시에 호텔에서 출발했다. 오늘은 어제 오후에 보기로 했다가 시간이 늦어 못 본, 에스토니아 탈린의 몇 군데 명소를 보고 바로 배를 타고 핀란드 헬싱키로 가야 한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여행 중 치명적 실수를 해 버렸다. 물병 마개를 제대로 막지 않고 그냥 무심코 가방을 눕혀 놓고 식사하고 왔더니 노트북에 물이 들어가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 안의 자료가 모두 망가질까봐 오늘 여행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내가 심하게 당황하고 절망하게 된다. 급기야 가이드한테 전후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여기는 그런 가전제품 수리하는 곳이 없고 있다하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하도 답답해서 동행한 동영상 사진가 ㅊ님한테 이야기했더니 일단 자꾸 말리라는 것이다. 자연 건조가 되면 괜찮아 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바깥 구경보다 노트북을 끌어안고 그냥 말린다고 애쓴다. 어쩔거나 그야말로 ‘엎질러진 물’인데. 그런데 벌써 화면이 뜨끈뜨끈해온다. 여기 자료가 모두 멸실되면 내가 앞으로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나 싶다. 깊은 절망감이 속 깊은 곳에서 마치 내 노트북 데워지듯 끓어오르는 것 같다.
아침 공기는 좀 쌀쌀했다. 탈린시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톰페아(Toompea)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곳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현지 가이드는 여기로 온 여자 유학생인데 발음이 얼마나 또록또록한지 기특하고 신통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먼저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을 만났다. 에스토니아가 재정 러시아 치하에 있던 1900년에 이 언덕에 건립된 것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 성당의 종탑은 11개의 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큰 종소리를 낸다고 한다. 예배 전에는 항상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와 성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는데 그냥 한 번 보고 나왔다. 이어서 언덕에 올랐다.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중세 건물들의 빨간 지붕과 첨탑이 정겹다. 그 뒤로는 바다가 보인다. 엊그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 너머에서도 보았던 핀란드만일 것 같다. 두 개의 높은 첨탑 중 오른 쪽이 시청사 건물이다. 북유럽의 중세 시청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언덕 아래로 내려와서 중앙 시장을 구경했다. 머플러, 주걱 같은 주방 용품 등, 아주 소박하고 진귀한 것들이 많이 진열돼 있다. 마치 우리네 5일장 난전처럼 정겹다. 여기서 우리 ㅊ 회장님이 고맙게도 자작나무로 정교한 무늬를 짜서 만든 냄비받침대 하나씩을 사서 선물해 주었다.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규모에 비해 탈린의 거리는 활기에 넘친다.
9시 반 지나서 탈링크 쾌속선을 탔다. 이제 핀란드 헬싱키를 간다.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배는 깨끗하고 깔끔했다. 핀란드만을 미끄러지듯 떠간다. 선실 버거킹 커피 점에서 에스프레소 두 잔, 라테 한 잔 시켜서 담소화락(談笑和樂)하는 새 그만 헬싱키에 도착해버렸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에도 노트북에 물 쏟아버려서 작동이 안 되고 뜨끈한 열마저 나는 것 같아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리라는 불안감은 떨칠 수 없다. 그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어 스스로 생각해도 화가 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마음이 무척 무겁고 특히 노트북 안의 다른 자료를 다 못쓰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아무런 다른 생각도 없다. 머릿속이 계속 하얘진다고 하면 딱 맞은 표현일 것 같다. 어쨌든 도착하니 12시 반쯤 됐다.
‘발틱해의 아가씨’라는 순박한 별명을 지닌 헬싱키(HELSINKI)는 핀란드(FINLAND)의 수도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무역, 경제, 정치의 중심지이다. 유럽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가진 청정도시이며 거리 곳곳의 공원과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헬싱키인을 볼 수 있다. 알바알토를 선두로 한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과 디자인 숍을 만날 수 있는 이 도시는 2012년 유럽의 디자인 수도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아! 잠시 동안이라도 시벨리우스의 고향 핀란드 헬싱키에 내가 왔다. 헬싱키의 중심 만헤르헤임 거리를 거쳐 식당가는 길에 ‘Choi Jeong Wha(최정화)’라고 영문으로 쓰인 전시 안내 대형 표지판을 보았다. 언뜻 보아도 붉은 색 연등을 포개 놓은 것 같기도 한 게 한국적, 동양적인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최’씨 성씨를 가진 우리 동포 이름을 보다니 뜻밖이었고 참 반가웠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출신 화가를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이란다.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우리 민족의 역량과 저력을 보여주는 동포가 있다는 게 정말 뿌듯한 마음이다. 만헤르헤임 거리는 헬싱키의 중심지로 잘 정돈되고 반듯한 현대식 빌딩 사이로 고풍스러운 중앙역 건물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차를 세우려고 하는데 몇 번이나 다시 헬싱키의 상징인 이 역 건물이 나타난다. 12시 50분까지 20분 정도 도심을 구경했다. 이어서 바로 점심을 먹었다. 깨끗한 해안을 끼고 부드러운 오월의 잔디가 깔린 시벨리우스 공원을 찾았다. 발트 해 특유의 호수 같이 고요하고 청정한 핀란드 만 너머에는 어제 우리가 묵었던 에스토니아 탈린이 손에 잡힐 듯 나타나 있다. 바로 앞에는 세우라사리라는 작은 섬이 나타나 있다. 물론 지도상이지만.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국민 영웅이자 국민 작곡가로 그의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이 공원이 세워졌다. 시벨리우스는 러시아에 저항해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민족적 정체성을 음악에 반영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지어 국민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600개의 강철 파이프로 만든 기념비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킨다. 그 옆에 있는 이 위대한 국민작곡가의 두상에도 어딘가 비장한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숨어 있다. 여기 공원에서 오월의 햇살을 따스하고 잔디밭에 배 깔고 독서하는 아가씨의 등이 더욱 따스해 보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두 팔을 갈매기 날개처럼 쳐들고 핀란드만 너머까지 날아갈 듯 까불락거리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여기서 모두들 전체, 혹은 커플끼리 기념 샷을 했다. 오후 1시 40분에서 2시까지 20분 머물렀다. 아쉽다. 나도 여기서 이 오월의 양광을 쬐면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면서 머물고 싶다.
오후 2시 20분 쯤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암석교회를 찾았다. 건축가 형제가 1969년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교회로 암석을 쪼개서 생긴 공간에 원형 유리를 덮어 마치 요새를 연상케 하는 비밀스런 공간이 탄생하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역시 현대 디자인의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는 헬싱키다운 곳이다. 최상의 음향시설과 해살이 내리쬐는 실내의 아름다운 모습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라는 이름은 붙어 있지만 명성만큼의 감동은 내가 이런 부분에 둔감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못 느끼겠다. 나지막하게 잘 정돈된 건물이 세워진 거리를 좀 걸었다. 이렇게 낯선 거리를 걷는 것은 헬싱키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운 느낌이 들었다. 거리에는 우리나라 전차와 같은 트램(Tram)이 아직 꼬불꼬불 꼬물거리면서 달리고 있는 게 무척 특이했다.
오후 3시 좀 지나 40만개의 화강암 바닥으로 이루어진 만남의 장소 원로원 광장에 도착했다. 34만여k㎡에 인구는 500여만 명 정도이니 너무나 넓은 국토에 여유있는 이런 광장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순백색의 헬싱키대성당이 고귀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명칭은 성당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다. 돔 형태의 지붕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이 교회는 핀란드 루터교의 본산이다. 성당 지붕에 있는 12사자상과 제단 위의 대형 그림이 주목되며 주요 국가 인사의 장례식과 결혼식 등 국가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원로원 광장 앞 우뚝 솟은 동상 하나, 과거 러시아 제국을 지배하던 홀슈타인 로마노프 왕가의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2세가 이 동상의 주인이다. 러시아의 지배하의 비록 식민지를 통치하던 군주이지만 민주주의를 심어준 핀란드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으며 성당 건립에도 큰 업적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학습 취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동상 주변에는 진홍, 진황의 튤립이 소담스레 심어져 있었고 청동 여인상과 날개를 단 천사의 상이 너무 예쁘고 화려해서 모두들 대대적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그 뒤로 많은 계단 위로 교회가 멀찌감치 점잖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하얀 건물을 가장 잘 감상하려면 하늘이 새파랗게 갠 날 보면 된다고 하는데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청군, 백군 그 색깔 같다. 맞은편에는 과거 원로원 건물이 옆으로 아담하게 서 있다. 과거 양원제 때 명칭이고 지금은 정부 종합청사, 헬싱키 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다시 올랐다. 오후 3시 반이 좀 지났다. 안내서에 나와 있는 만네르헤임 거리의 만네르헤임 기마상과 붉은 벽돌, 푸른 지붕으로 덮인 러시아 정교회 우스펜스키 사원은 결국 창 밖 여행에서 놓쳐버린 것 같아 아쉽다.
이제 스웨덴으로 가기 위한 유람선 실야라인(Silja Line)을 타기 위해 핀란드의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과거 수도 투르쿠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오후 6시 좀 지나 투르쿠에 도착해서 실자라인 여객 터미널에 도착했다. 과연 말로만 듣던 실자라인 크루즈 여객선의 위용 그대로 규모가 엄청나고 시설도 화려했다. 실자라인은 핀란드와 스웨덴을 왕복하는 초호화 유람선으로 길이 203m, 너비 31.5m, 수용 승객 2,900명 규모로 2인 1실용 선실에는 옷장, 에어컨, 샤워실, 화장실 등이 완비돼 있어 비록 약간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호텔 객실처럼 편리하게 돼 있으며, 면세점, 사우나, 수영장, 카지노, 바 등 각종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기내 식사를 하고 9시 30분에 모두들 모였다. 배가 호수 같은 발트해면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듯 떠가는 느낌을 즐긴다. 저물어가는 바다를 한번씩, 여정에 흠뻑 취해 있는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번갈아 바라본다. 이제 정말 와인에 취하는 것보다 북유럽의 낯선 여정에 빠져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반주로 마신 와인 기운이 남아 있는지 여행의 즐거움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내친김에 모두들 카지노에 가서 잠시라도 슬롯머신을 즐겨본다. 아주 오래 전 미 서부 라플린에서 하룻 묵을 때나 훌쩍 떠나서 무작정 찾아보았던 정선 카지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이게 바로 크루즈 여행의 맛인가. 여기도 역시 백야(白夜)라 아직 날이 훤하다. 이제 푹 자고 나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2016. 5. 18. 수. 맑음.] 2021. 5. 18.